8월의 독립운동가에 중국 남만주 지역의 독립운동 통합에 적극 참여하고, 통의부를 이끌어간 주도적 인물인 강제하(1891~미상), 이웅해(1878~미상), 백남준(1885~미상), 최명수(1881~1951) 선생이 선정됐다.1920년 만주지역에서 독립군의 활동으로 큰 피해를 입은 일제는 2만 명에 이르는 일본군을 만주지역으로 침입시켰고, 이들은 이듬해 4월까지 한국 독립군의 근거지가 있는 북간도와 서간도를 대상으로 온갖 만행을 자행했다.이에 1922년 8월 남만주 17개 독립운동 단체 대표 50여 명이 모여 남만한족통일회의를 열었고,
8월의 6·25전쟁영웅에 백골부대 대대원으로 748고지 탈환에 기여한 김왕호 육군 소령이 선정됐다.그는 갑종장교 1기로 입대, 1950년 10월 육군 소위로 임관하고, ‘백골부대’로 알려진 제3사단에 배치됐다. 이후 1952년 4월 대위로 진급한 그는 제3사단 22연대 1대대 3중대장에 임명됐다.1952년 9월 양구 북방 주 저항선 상의 748고지, 일명 피의고지를 중공군에 빼앗긴 제3사단은 두 차례의 고지 탈환에 실패하자, 제22연대 1대대를 투입했다. 공격 임무를 부여받은 제3중대장 김왕호 대위(당시 계급)는 정면 공격으로는 고
7월의 독립운동가에 임시정부의 주춧돌이 된 상하이 독립운동단체 ‘동제사’의 세 주역 김갑, 한흥교, 민제호 선생이 선정됐다.김갑 선생은 1917년 동제사에 가입해 활동했다. 그는 임시의정원 경상도 대표 의원, 임시정부의 교통부 위원, 군무위원회 이사, 법제위원회 위원 등으로 활약했다.한흥교 선생은 의사로 일하며 평생을 독립활동을 펼쳤다. 한 선생은 동제사를 조직했고, 이후 비밀리에 임시정부에 서류 전달, 민족독립을 모색하는 글을 쓰고, 해방될 때까지 중국에서 독립운동 활동을 펼쳤다.민제호 선생은 1913년 동제사에 가입했다. 상하이
7월의 6·25전쟁영웅에 6·25전쟁 당시 최전방 기지에 배치돼 수 많은 전과를 올린 남아프리카공화국 공군 제2전투비행대대가 선정됐다.비행대대는 실질적으로 전투 임무를 개시한 11월 19일부터 정전협정이 체결된 1953년 7월 27일까지 부산 수영, 평양, 수원, 진해, 여의도, 횡성, 오산 비행장 등 최전방기지에 배치돼 지상군 근접 지원, 적 보급로 차단 등을 수행했다.비행대대는 참전 기간 동안 연간 95대의 F-51 무스탕 전투기와 20대의 F-86 세이버제트 전투기를 1만2,405회 출격해 적의 전차 44대와 야포 221문,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31년 말, 김구 선생을 단장으로 의열투쟁의 실천조직인 한인애국단을 결성했다. 비밀리에 조직·운영된 한인애국단의 단원들은 일왕, 조선총독부, 일본군사령부 등을 작전 대상으로 삼았다.안중근 의사의 사촌동생인 안경근 선생은 단장인 김구 선생을 보필하고, 그의 신변을 경호했으며, 중국측 지원을 받아 중국 군관학교를 통해 한인 군사인재를 양성하는데 있어 주도적 역할을 했다.이덕주 선생은 식민통치 최고 책임자인 조선총독 우가키 가즈시게를 처단하려 했으나 사전에 발각돼 징역 7년형을 언도받았다.최흥식 선생은 중국 다롄에서
이달의 6·25전쟁 영웅에 독립운동부터 6·25전쟁까지 우리나라 하늘을 굳건히 지켜낸 최용덕 공군 중장이 선정됐다.1898년생인 최용덕 중장은 중국 육군군관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뒤 3·1운동 직후 의열단에서 중추적 역할을 맡았다. 1920년 그는 중국 보정항공학교에 들어가 전투기 조종사로 성장했으며, 그는 독립운동에 참여하면서 중국 공군으로 복무하며 항일투쟁에 나섰다. 이후 그는 광복군 총무처장과 참모처장 등을 지내며 해방 후 귀국해 공군 창설에 헌신했다. 6·25전쟁 직전 공군사관학교장에 보임된 그는 개전 당시 김포지구 경비사령부
이달의 독립운동가에 민족통합적 여성독립운동 단체인 근우회를 이끈 여성독립운동가 박원희, 김영순, 조복금 선생이 선정됐다. 근우회는 1927년 창립된 여성독립운동단체로, 국내외 69개 지회를 두고, 여성의식 향상을 위한 강연회와 토론회, 문맹퇴치를 위한 부인야학 개설 등의 활동을 펼쳤다. 또한 전주여고보 사건, 진명여고보 사건, 광주학생 사건 등에 대해 ‘퇴학처분해제 권고문’ 등을 발송하며 여학생운동을 지원했다. 근우회는 민족주의 여성운동계와 사회주의 여성운동계가 함께한 좌우연합 성격의 단체였다. 박원희, 김영순 선생은 근우회 발기인
이달의 6·25전쟁 영웅에 경기도 연천 니키고지에서 신호탄을 쏘아 올려 아군 중대의 역습을 이끌어내 진지를 사수하는데 기여한 송태호 육군 하사가 선정됐다.1951년 6월 입대한 송태호 하사는 제1사단 15연대 수색중대 1소대에서 소총수로 복무했다.1952년 10월 6일 중공군은 추계공세의 개시와 함께 연대 방어선을 정면에서 포격하고, 수색중대 1소대가 지키던 경기도 연천의 니키고지를 공격해왔다. 송태호 하사 등 소대원들은 중공군을 진지로 끌어들여 섬멸하기 위해 동굴호(湖)에 집결했고, 동굴 안에 엄폐한 소대가 진내사격을 요청했으나
이달의 독립운동가에 신민회 주역으로 활약하며 국권회복을 위한 애국계몽운동을 펼쳤던 안태국 선생이 선정됐다.평안남도 중화군에서 태어난 안태국 선생은 1907년 법률사무소에 취업해 활동하던 중 그해 9월 안창호 선생의 권유를 받아 신민회 창립회원으로 가입하고 신민회 평안남도 총감으로 임명됐다.신민회는 창립 이래 국권회복을 위한 애국계몽운동에 주력했다. 안태국 선생은 신민회 활동을 적극적으로 이어가며 계몽강연회를 통해 애국주의와 국권회복, 민권사상, 신사상, 실력양성을 호소했다. 또한 신민회 기관지 역할을 하는 ‘대한매일신보’ 평양지사장
이달의 6·25전쟁영웅에 형제의 나라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폭격기 조종사로 참전해 장렬하게 전사한 무자페르 에르된메즈 터키 공군 중위가 선정됐다.무자페르 에르된메즈 중위는 1922년 이스탄불에서 태어나 부르사 군사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터키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1947년 중위로 진급했다.6·25전쟁이 발발하자 1950년 9월 그는 터키 여단의 일원으로 참전해 전방항공통제 임무를 맡았다.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지휘관들에게 조종사로서 전쟁에 참여하고자 하는 의사를 밝혔고, 1951년 1월 마침내 조종사로 미 제8군 본부 제452폭
이달의 독립운동가에 1919년 3월 5일 군산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이들이 선정됐다.당시 교사였던 이두열·고석주 선생은 다른 교사들과 함께 3월 6일 군산 장날에 맞춰 만세운동을 준비하던 중 거사 하루 전 일제에 발각돼 체포됐다. 이 모습을 본 학생들이 거세게 일어나 만세운동이 시작됐고, 민중들도 대거 가세했다.영명학교 교장이었던 윌리엄 린튼 선생은 만세운동을 은밀히 지원했다. 이후 미국으로 돌아가 일제의 잔학한 통치와 한국인들의 저항을 생생히 증언하고, 한국 독립의 필요성과 지원을 주장했다.노동자로 일하던 김수남 선생은 만세운동
이달의 6·25전쟁영웅에 강두형 육군 준장이 선정됐다.1952년 10월 14일 새벽 국군 제2사단은 오성산 남쪽 중공군 전초인 저격능선을 공격했고, 첫 공격에서 저격능선을 탈취했으나 그날 밤 적의 역습으로 저격능선을 빼앗겼다.10월 15일 제17연대 제2대대장이었던 강두령 소령(당시 계급)은 전날 빼앗긴 저격능선 상 ‘A고지’를 공격해 재탈환했다. 그날 밤 적군의 반격이 이어졌고 밀집방어를 했지만 고지를 다시 빼앗겼다.이에 강 소령은 예비중대 1개 소대를 차출해 반격에 나섰고 소대가 분산되고 소대장마저 부상을 입자 강 소령이 직접
이달의 독립운동가에 3·1운동부터 신간회 창립 등 평생을 독립운동을 위해 헌신했던 강기덕 선생이 선정됐다.함경남도 원산 출신인 강기덕 선생은 보성법률상업학교 3학년이었던 1919년, 3·1독립운동에 민족대표 48인의 한 사람으로서 학생층의 참여를 이끌었다.이후 선생은 고향인 원산으로 돌아가 인쇄업에 종사했으며, 1927년 7월 신간회 원산지회 간사를 맡으면서 신간회 활동에 적극 참여했다.선생은 원산과 영흥, 고원 일대에서 청년들과 함께 한일병탄 기념일에 격문을 제작하고 배포할 계획을 세우다 경찰에 적발됐다. 그러던 와중에 언론의 자
이달의 6·25전쟁영웅에 전쟁 당시 활약했던 여성의용군이 선정됐다.1950년 9월 육군은 여자의용군교육대를 창설했다. 교육대를 거친 여성들은 국방부, 육군본부, 여군훈련소, 전방 군단 및 사단 등 전후방 각급부대에 배치되어 전투활동, 전투지원 임무를 수행했다.해병 여군은 6·25전쟁 발발 직후 제주도에서 자원입대한 여교사와 여학생들로 편성됐다. 이들은 진해 해군통제부와 부산의 해군본부에서 행정·보급·정비·간호보조 등의 분야에서 활동했다.공군 여성항공병은 서울 수복 이후 공군본부 참모부서에서 행정보조업무를 수행했다. 한편 육군과 해군
이달의 독립운동가에 제주에서 해녀항일운동을 펼친 부춘화(1908~1995), 김옥련(1909~2005), 부덕량(1911~1939) 선생이 선정됐다.부춘화, 김옥련, 부덕량 선생은 제주해녀항일운동의 주역으로, 1932년 1월 제주도 하도·종달·세화·우도·시흥·오조리 지역의 해녀 1,000여 명이 참가한 투쟁을 주도했다. 세 분은 1931년 12월 20일 일제의 해녀 착취에 항의하기 위해 모집된 하도리 해녀회 대표회의에서 대표로 선출됐다. 이들은 함께 선출된 대표 10여 명과 함께 1932년 1월 세화리 장터에서 해녀들을 규합하며 시
이달의 6·25전쟁영웅에 백마고지 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한 정락구 육군 중위가 선정됐다.백마고지전투는 1952년 10월 철원 백마고지에서 국군 제9사단이 중국군의 공격을 수차례 격퇴한 전투로, 이 전투에서 백마부대는 중국군 1만3,000여 명을 격멸하는 전과를 거둔 바 있다.정락구 중위는 6·25전쟁 중인 1952년 갑종장교 제12기를 거쳐 육군 소위로 임관해 국군 제9사단 28연대 11중대 소대장으로 근무했다. 그는 1952년 7월 화랑무공훈장을 받은 바 있다.백마고지가 한창이던 1952년 10월 13일 정 소위(당시 계급)는 자신
이달의 독립운동가에 러시아 연해주에서 권업회를 결성해 항일운동을 펼친 이종호(1885~1932), 김학만(생몰년 미상), 최봉준(1859~1917) 선생이 선정됐다.권업회는 러시아에 거주하는 한인들을 위한 경제 단체를 표방하며 1911년 6월 1일 설립된 단체로, 실제로는 조국독립을 목표로 했다. 권업회는 기관지 ‘권업신문’을 통해 한인 동포들의 애국정신과 민족의식 고취에 크게 기여하는 한편 교육진흥에도 역점을 두고 민족주의 근대교육을 통한 인재 양성에 힘썼다.이종호 선생은 권업회 설립에 참여해 창립총회에서 부의장에 선임됐고, 김학
이달의 6·25전쟁영웅에 1950년 7월 13일부터 16일까지 문경 북쪽의 이화령 일대에서 북한군 제2군단 예하 제1사단의 남진을 지연시킨 이화령 전투에서 전사한 김용하 육군 소령이 선정됐다.6·25전쟁 초기 제6사단에 배속된 김용하 소령(당시 계급은 대위)은 사단의 소백산맥 방어작전에 따라 제2연대 1대대 중화기중대장으로 문경지역 방어에 투입돼 이화령 전투에 참전했다.이화령 전투에서 제2연대는 북한군에 진지를 빼앗긴 후 역습으로 진지를 탈환했으나 북한군의 공격으로 철수를 단행했고, 김용하 소령은 화력으로 아군 주력의 철수를 엄호했
이달의 독립운동가에 을사늑약에 죽음으로 항거한 4인의 순국지사인 홍만식(1842~1905), 이상철(1876~1905), 김봉학(1871~1905), 이건석(1852~ 1906)선생이 선정됐다.1905년 11월 18일 아침 늑약이 체결됐다는 소식이 알려졌다. 학생과 교사들은 등교를 포기하고, 관료들은 업무를 전폐하고, 많은 애국지사들이 일제의 불의에 항거하기 위해 최후의 방안이자 가장 강렬한 저항운동으로 자결 순국했다.홍만식 선생은 그 해 11월 28일 자식과 조카에게 굳은 의지를 알리고 약을 삼켜 순국했다.이상철 선생은 을사늑약이
이달의 전쟁영웅에 장진호 전투에서 흥남 철수 작전을 성공으로 이끈 올리버 프린스 스미스 미국 해병 대장이 선정됐다.올리버 프린스 스미스는 6·25전쟁에 미 해병대 제1사단장으로 참전했다.1950년 10월 원산에 상륙한 미 해병 1사단은 11월 27일 장진호 주변까지 진격했으나, 압도적으로 우세한 중국군의 맹렬한 반격에 퇴로가 차단될 위기에 놓이자 철수 작전에 돌입했다.1만여 명의 병력과 수많은 피란민, 1,000여 대의 차량과 각종 전투장비의 대대적인 철수를 앞두고, 상부는 모든 장비를 버리고 병력만 수송기로 철수하라 제안했다. 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