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의 6·25전쟁영웅으로 고길훈 해병 소장이 선정됐다.1950년 7월 초 충청남도 천안을 점령한 북한군 제6사단 제13연대가 호남지역으로 남하하자, 고길훈 부대는 7월 16일 군산에 상륙해 적의 충청남도 서천군 장항 방면 진출을 저지했다. 또한 7월 18~19일에 전라북도 군산, 이리(현 익산) 방면 공격을 성공적으로 저지해 해병대 최초의 전투에서 승리했고, 적 사살 62명, 부상 311명, 포로 5명 생포 등의 전과를 올렸다.1950년 9월 고길훈 소장(당시 소령)은 해병대 1대대장으로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한 후, 국군 최초로 한
3월의 6·25전쟁영웅에 한문식 해군 대령이 선정됐다.한문식 대령은 1945년 11월 해방병단(해군의 전신)에 입대해 1950년 6·25전쟁에 참전했다. 그는 1950년 8월 6~7일 서해안 봉쇄작전에 참전, 다수의 적선을 격침해 적의 무장병력과 군수물자 수송을 차단하는데 기여했고, 이후 금강산함장으로 임무를 수행했다.1952년 7월 15일 적 300여 명의 기습공격으로 창린도를 점령당하자 금강산함, 영국 벨파스트함, 호위함 등으로 구성된 아군부대는 연합작전회의를 열고 창린도 재탈환을 결정했다.한문식 대령(당시 소령)은 아군 함정들
2월의 6·25전쟁영웅에 대한민국 하늘을 지킨 미 공군 조지 앤드류 데이비스 주니어(George Andrew Davis Jr., 1920.12.1.~ 1952.2.10.) 미국 공군 중령이 선정됐다.조지 중령은 6·25전쟁이 발발하자 1951년 10월 제4전투요격비행단에 배치돼 신의주 상공에서 아군을 엄호하는 ‘미그 회랑(MiG Alley)’ 초계임무 등을 수행했다. 전쟁기간 중 총 60차례의 출격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며 적기 14기를 격추한 그는 ‘하늘의 사냥꾼’으로 불리며, 유엔군 내 최고의 격추 기록(전사 당시 기준)을 보
1월의 6·25전쟁영웅에 덴마크병원선 유틀란디아가 선정됐다.덴마크는 6·25전쟁 중 총 3차에 걸쳐 유틀란디아를 한국에 파견해 전쟁 부상자들을 치료했고, 정전 이후에는 국립의료원 설립에 참여하는 등 대한민국 의료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1950년 6월 27일 유엔이 한국에 대한 군사원조를 결의하자, 덴마크 정부는 의료지원 제공을 결정하고 유엔회원국 가운데 가장 먼저 지원의사를 통보했다. 1951년 3월초 4개의 수술실과 356개의 병상을 구비한 유틀란디아가 부산에 입항할 무렵, 유엔군이 재반격 작전을 전개하고 있어 전상자가 늘어나고
12월의 전쟁영웅에 춘천 전투, 낙동강 전투 등 수많은 전투에서 공을 세우고, 국군의 선봉부대로 압록강변 초산까지 진격했던 이대용 대한민국 육군 준장이 선정됐다.이대용 준장은 6·25전쟁이 발발하자 제6사단 7연대 1중대장으로 수많은 전투에 참전했다. 1950년 6월 25~28일 강원도 춘천 전투에서 북한군 2개 중대를 격전 끝에 저지했다.이 준장은 경상북도 낙동강 전투, 강원도 화천 전투 등 수많은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이 준장은 1950년 10월 26일에는 국군의 선봉부대로 압록강변 초산까지 진격해 그의 부대원들이 강 언덕 높이
11월의 6·25전쟁영웅에 6·25전쟁에 참전해 대한민국을 지켜낸 미 해병대 부자(父子) 영웅 필드 해리스 중장(1895.9.18.~1967.12.21.)과 윌리엄 프레데릭 해리스 중령(1918.3.6.~1950.12.7.)이 선정됐다.아버지 필드 해리스(Field Harris)와 아들 윌리엄 프레데릭 해리스(William Frederick Harris)는 미국 해병대 소속으로 1950년 11~12월 장진호 전투에 참전했다.필드 해리스 중장은 미 제1해병항공단장으로 인천 상륙 작전, 서울 수복 작전, 원산지구 전투 등에 참전했고,
10월의 6·25전쟁영웅에 고랑포 지서 재탈환 작전 중 순직한 김기태 경감이 선정됐다.1950년 김기태 경감(당시 계급 경위)은 임진강 38선 접경에 위치하고 전략적 요충지인 장단경찰서 관할 고랑포 지서에 근무 중이었다.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파죽지세로 남하해 경기도 파주 문산지구에 이르렀고, 북한군 제1사단은 구화리에서 고랑포와 적성면 방향으로 공격해왔다.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에 의해 고랑포 지서가 점령당하자 이 소식을 접한 홍은식 장단경찰서장은 전 직원에게 관내사수를 명령하고, 김기태 경위를 대장으로 하는 21명의 특공대
9월의 6·25전쟁영웅에 민혜동 대한민국 육군 중위가 선정됐다.민혜동 중위는 1951년 제9사단 제29연대 11중대 3소대장으로 강원도 철원지역 최전선에 배치됐다. 당시 제9사단은 전략적 요충지인 395고지(백마고지)와 281고지(화살머리고지)를 방어하고 있었다.국군은 1951년 11월 3일 중공군 제42군 예하의 376연대의 대대적인 기습공격으로 281고지를 빼앗긴 후 반격작전을 전개했다.민 중위가 소속된 제3소대는 적의 측면을 공격하라는 임무를 부여 받았다. 적의 기관총 진지를 제압하지 않고서는 281고지 탈환이 힘들다고 판단한
8월의 6·25전쟁영웅에 ‘귀신 잡는 해병대’ 신화의 주인공 김성은 해병대 중장이 선정됐다.김성은 중장은 1946년 해군 소위로 임관해, 1949년 해병대 창설 시기에 해병대 참모장에 보임됐다.6·25전쟁이 발발하자 김성은 부대는 1950년 7월 22일부터 남원·함양·진주지구에서 북한군 제6사단의 공격을 지연하는 작전을 전개했고, 8월 6일에는 야반산을 공격·탈환해 전 부대원 1계급 특진의 영예를 안았다.1950년 8월 16일 북한군 제7사단은 통영을 침공했고, 김성은 부대는 통영 장평리 해안에 기습 상륙작전을 감행, 원문고개와 망
7월의 6·25전쟁영웅에 테드 윌리엄스(Ted Williams) 미국 해병대 대위가 선정됐다.테드 윌리엄스 미국 해병대 대위는 메이저리그 보스턴 레드삭스(Boston Red Sox)의 대표 타자였다.그는 시즌 타율 4할을 넘기며 선수 생활의 정점을 맞이하던 1942년,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조종장교로 활약했고, 종전 후 메이저리그에 복귀했다. 그는 6·25전쟁이 일어나자 다시 배트를 놓고 참전, 1952년 5월 미 해병대 제311해병전투비행대대 소속으로 포항에 배치돼 1년 동안 총 39회의 전투 출격을 기록했다.1953년 2월
6월의 6·25전쟁영웅에 전투 중 목숨을 걸고 유선 통신선 복구에 나섰다 전사한 홍윤조 대한민국 육군 중위가 선정됐다.홍윤조 중위는 1953년 1월 육군 소위 임관과 동시에 제8사단 제16연대 통신 가설 장교로 임명됐다.1953년 7월 13일, 중공군은 유리한 지형과 작전상 요지를 확보하기 위해 중부전선에 5개 군단을 투입해 최후 공세를 시작했다.중공군의 인해전술로 도처에서 백병전이 벌어지는 와중에 제8사단 제16연대의 철수계획이 변경됐지만, 예하 1대대는 통신선 단절로 철수계획을 전달받지 못해 고립 위기에 처했다.이에 홍윤조 소위
5월의 6·25전쟁영웅에 포로수용소에서 인류애를 실천한 에밀 조세프 카폰(Emil Joseph Kapaun) 미국 군종 신부가 선정됐다.에밀 조세프 카폰 신부는 1950년 7월 미국 군종 신부로 파병됐다.그가 속한 부대인 제1기병사단 제8기병연대가 평안북도 운산까지 진격한 뒤 중공군에 의해 고립돼 후퇴하게 되자 그는 부상자들을 돌보기 위해 자발적으로 잔류했다.카폰 신부는 1950년 11월 중공군에 의해 전쟁 포로로 잡혀 포로수용소에 수감됐다. 수용소에서도 그는 부상자들을 간호하고, 부상자들을 위해 목숨을 걸고 음식을 구해오는 등 인
4월의 6·25전쟁영웅에 대한민국 해군 피티(PT, Patrol Torpedo Boat, 어뢰정) 편대가 선정됐다.6·25전쟁 당시 해군은 수심이 얕고 섬이 많은 한반도 해안에서 작전이 편리한 톤수가 적고, 속력이 빠르며, 화력도 강한 함정이 필요했다.해군은 1952년 1월 일본의 미 해군기지에서 피티 4척을 인수해 피티 편대를 창설했다. 당시 피티-23·26 편대는 서해안에서, 피티-25·27 편대는 동해안에서 주로 작전을 수행했다.서해안 피티 편대는 대청도에 기지를 두고 장산곶, 옹진반도, 해주 등 해안에서 활동 중인 적 함선과
3월의 6·25전쟁영웅에 알베르토 루이즈 노보아(1917.1.3.~ 2017.1.14.) 콜롬비아 중령이 선정됐다. 알베르토 루이즈 노보아 중령은 1952년 7월 2일 콜롬비아대대 제2대 대대장으로 부임한 후, 7월 13일 강원 철원 탑동 전선에 배치됐다. 탑동 진지는 서북쪽으로 강원 평강, 서남쪽으로 강원 철원, 동북쪽으로 강원 금성에 이르는 철의 삼각지 중앙에 위치한 전략적 요충지였다.노보아 대대장이 지휘한 콜롬비아대대는 1953년 3월 10일 바브라 작전을 통해 중공군 전초진지(180고지)를 역습해 적 방어진지와 화기진지를 전
최종성 공군 소위(당시 계급)는 경남 거창 출생으로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6월 공군 조종간부 후보생(제1기)으로 입대, 1952년 8월 교육을 마치고 소위로 임관했다.최종성 소위는 공군 제10전투비행전대 소속 에프51(F-51)전투기 조종사로 1952년 9월 23일 가평군 현리와 강원도 회양에 있는 적 보급물집적소를 파괴하는 작전에 처음 출격했다.최 소위는 10월에는 16일, 20일, 25일, 27일, 30일 하루 2회씩 출격해 강원도 고성과 원산 등지에서 적 주요 보급로를 차단하고 병력 집결지와 군용시설을 공격해 적
1월의 6·25전쟁영웅에 벨기에·룩셈부르크 대대가 선정됐다.벨기에와 룩셈부르크는 6·25전쟁 발발에 따른 유엔의 참전 요청에 따라 벨기에군 700명, 룩셈부르크군 48명으로 ‘제1벨기에 대대’를 편성했고, 벨기에 대대는 1951년 1월 31일 부산에 도착했다.벨기에 대대는 미국 제3사단에 배속돼 1951년 4월 22~25일 임진강 북쪽 금굴산 전투에서 중공군 공세를 이틀에 걸쳐 저지해 영국군이 철수로를 확보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또 1951년 10월 11~13일 강원도 철원의 학당리 전투 등에 참여해 많은 공을 세웠다.특히
12월 6·25전쟁영웅에 영국 해병대 더글라스 드라이스데일(Douglas Burns Drysdale) 대령이 선정됐다.더글라스 드라이스데일 대령은 6·25전쟁 당시 영국 제41해병 독립특공대를 지휘하는 특공대장을 맡아 1950년 9월부터 1951년 12월 말까지 참전했다.더글라스 드라이스데일 대령과 그가 이끄는 특공대는 북한지역 해안 기습침투를 성공적으로 수행해 적진의 주요시설을 파괴하는데 공을 세웠다.또한 장진호 전투 당시 미 제1해병사단이 중공군의 위협에 처한 상황에서 ‘드라이스데일 특수임무부대’를 이끌고 중공군에 맞서 진격했다
11월의 6·25전쟁영웅에 평안남도 동양리 전투에서 활약한 이창환(1929.8.5.~1950.11.20.) 하사와 한규택(1930.4.16.~1950.11.20.) 하사가 선정됐다.이창환·한규택 하사는 해병대 3대대 제11중대 소속으로, 1950년 11월 평양-원산 간 도로 차단과 아군의 보급선을 위협하는 적 패잔병을 소탕하는 임무를 수행했다.당시 제3대대장은 11월 20일 대대 규모의 패잔병이 평양-원산 간 도로의 요충인 평안남도 양덕군 동양리 일대 장악을 시도하자 이를 저지하기 위해 제11중대를 출동시켰다.이때 제2분대장이었던
10월의 6·25전쟁영웅에 완도 약산전투에서 활약한 경찰 김재봉 경위가 선정됐다.완도 약산전투는 일명 조약도 작전으로도 불리며, 1950년 7월 말부터 9월 중순까지 전남경찰국 예하 부대가 북한군 제6사단의 우회 기동 저지를 위해 펼친 서남부지역 유격전 중 장흥 경찰부대가 완도군 약산면에서 벌인 해안방어전투이다.6·25전쟁이 발발하자 김재봉 경위(당시 계급 경사)를 비롯한 전남 장흥경찰서 소속 70여 명과 지역 방위군 30여 명은 북한군 진출을 저지하기 위해 전남 완도 약산도에서 해안방어 임무를 수행했다.1950년 9월 14일 북한
9월의 6·25전쟁영웅에 여수 철수 작전, 장사 상륙 작전 등 임무에서 활약한 전차상륙함(Landing Ship Tank) 문산호가 선정됐다.문산호는 6·25전쟁 개전 당일 해군 묵호경비부에 징발돼 묵호-포항 간 철수와 복귀 병력을 수송했다. 1950년 7월 27일에는 여수 철수 작전에 참가, 백두산함의 엄호 아래 병력 600여 명과 차량 30여 대를 수송했다.1950년 9월 14일 문산호는 경북 영덕의 장사동 해안에 상륙할 육군 독립 제1유격대대 수송에 참여했다. 841명을 태운 문산호는 부산항을 떠나 미군 함정의 안내로 새벽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