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그의 단정도 뱃머리가 파손되는 타격을 입자, 예안리 해안에 상륙한 뒤 적을 향해 기관단총을 연사하며 스스로 표적이 돼 적의 사격을 유인함으로써 피난민의 희생을 최소화했다. 결국 그는 교전 중 흉부와 복부에 관통상을 입고 전사했다.살신성인의 희생정신으로 840명의 피난민을 안전하게 구출한 그는 군인 정신의 귀감으로 기려지고 있으며, 2012년에는 그의 이름을 딴 최첨단 유도탄 고속함(홍대선함)이 진수됐다.1951년 LST-801(천안)함 VP(단정)정장으로 서해경비작전에 참가 중이던 홍대선 삼등병조는 1952년 1월 4일 피난
제2차 세계대전에서 24세 나이로 호주 최연소 대대장이 돼 전공을 세운 찰스 그린 중령은 종전 후에는 일반인으로 돌아와 부인과 어린 딸의 가장으로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6·25전쟁이 발발하자 새로 창설된 정규 육군 첫 호주 보병대대 지휘관으로 선임돼 다시 전장으로 향했다. 1950년 9월 8일 일본에 도착한 그린 중령은 당시 훈련 수준이 매우 빈약했던 대대를 몇 주 만에 최정예 적군에 맞서 전투를 수행할 수 있는 견실한 전투부대로 바꿔 놓았다. 그가 이끄는 호주 육군 제3대대는 9월 29일 부산에 상륙한 뒤 영연방
이설 선생은 충남 홍성의 양반가문에서 태어나 남당 한원진의 학통을 잇는 이돈필 문하에서 수학했다. 문과에 급제하고 사간원 정언과 교리를 비롯해 동부승지 등 여러 관직을 역임했다. 정부에서 계속해 관직을 제수했으나 이를 거절하고 그때마다 상소를 올려 정국의 문제점과 방향을 비판적으로 지적했다.선생을 비롯한 홍주지역 유생들의 사상은 위정척사론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그러나 선생의 위정척사론은 급변하는 국내외 정세에 따라 척사의 대상을 달리했다. 초기에는 소중화를 지키고 사학을 물리쳐야 한다는 입장이었으나 별자수호조약이 체결되자 이를 항
1950년 7월 대전에서 창설된 공군정찰비행대는 전선이 남하함에 따라 김천과 의성, 영천기지로 이동해 적정 정찰과 연락 임무를 수행하면서 한국군의 작전을 지원했다. 8월로 접어들며 포항과 영천지구에 대한 북한군의 공세가 더욱 강화됐다. L-4정찰비행부대 조종사로서 제2군단에 파견돼 있던 전구서 이등상사는 정찰작전을 수행하던 중 포항 기계 방면으로 침입하는 적 지상군 2개 대대를 발견하고 유엔공군의 F-51전투기로 유도해 적을 전멸시켰다. 긴박한 전세 속에 전구서 이등상사의 기민한 대응이 이룬 쾌거였다. 9월의 대대적인 적의 포위공격
이탁 선생은 평남 평원 출신으로 1908년 평양 대성학교에서 도산 안창호 선생의 지도를 받던 중 신민회에 가입했다. 1910년 만주로 망명해 신흥강습소 설립에 참여했고 1913년 만주 유하현 소재 일신학교 교장으로 재직했다. 1914년 신흥무관학교 경영에 참여하고 1919년 매국 7적 응징을 목적으로 27결사대를 조직해 격문을 배포했다. 1920년 7월 미국 의원단 내한 때 안경신 선생을 비롯한 3개 결사대를 국내로 파견해 평남도청을 폭파하는 등 독립의지를 전 세계에 알렸다. 1922년 상해 대한적십자사 감사로 선임됐고 같은 해 7
미국인 선교사 부부의 아들로 평양에서 태어난 윌리엄 해밀턴 쇼는 자신을 한국인이라 생각했고 한국을 조국으로 여겼다. 평양에서 고등학교를 마쳐 유창한 한국어 실력을 갖췄으며 한국인 친구들도 많았다. 미 해군에 입대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노르망디 상륙작전에도 참전했던 쇼 대위는 1947년 전역 후 한국으로 돌아와 미 군정청 소속으로 ‘조선 해양경비대사관학교(현 해군사관학교의 전신)’에서 교관으로 근무하며 생도들을 가르쳤다. 교관 근무 중 학업에 뜻을 품고 미국으로 건너가 하버드에서 철학 박사학위과정을 진행하다가 6·25전쟁이 발발하자
한국광복군 제1지대장 이준식 선생은 1919년 3·1운동 직후 중국으로 건너가 1921년 중국 곤명에 위치한 운남강무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만주 대한통의부에 가입해 항일무력세력을 재정비하는 등 활발하게 활동한 결과, 1924년 정의부 중앙위원에 선임됐다. 1927년 정의부 군사위원장 오동진이 일제에 체포되자 그 후임으로 임명됐다. 이듬해인 1928년에는 만주지역 3부가 통합해 조직된 국민부의 군사위원장에 선임됐고 1929년 조선혁명당이 창설되자 조선혁명당 중앙위원 및 산하 무력단체인 조선혁명군 참모장으로 활약했다. 이준식 선생은 1
1949년 개성상업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해병 2기생으로 군에 입대했던 고종석 일등병조는 김성은 부대에 배치돼 지리산과 제주도 일대 공비토벌작전에 참가해 공을 세웠다.그는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경남 진동리지역에서 북한군 제6사단 정찰대대를 기습 공격해 침공을 저지함으로써 진동리-마산 간 보급로를 타개하고 낙동강 최후 방어선을 사수하는데 크게 기여했다.8월 16일 낙동강방어선에서 교착상태에 빠진 북한군이 전략요충지인 마산과 진해를 해상에서 봉쇄하기 위해 통영에 침입하자 당시 손원일 해군 중장은 해병대에게 출동명령을 하달했다
연기우(延基羽) 의병장은 강화진위대 부교 출신으로 1907년 일제의 대한제국군 강제 해산에 격분해 강화진위대 군인들을 이끌고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군대해산 이후 의병항쟁이 전국으로 확산될 때 주요 의병부대는 이인영을 중심으로 13도창의대진소를 결성했다. 전국 각지에서 경기도 양주로 모여든 연합의진은 서울 진공작전을 감행하여 일본군과 4개월 동안 치열한 전투를 치렀다. 선생은 서울 진공작전 중 부상을 입고 체포됐으나 일제의 경비가 느슨한 틈을 타 탈출했다.1908년 13도창의대진소가 해산되자 선생은 서울, 경기, 황해지역 의진과 연합
1953년 7월 휴전조인을 앞둔 상황에서 중공군은 이른바 ‘7•13공세’라고 불리는 대규모 공세를 펼쳐 왔다. 강원도 김화군 원동면에 위치한 교암산의 금성돌출부를 차지하기 위한 중공군 최후 공세도 그중 하나였다.7월 13일 21시 적은 교암산 전초에 공격을 가했다. 자정 무렵 전초를 우회한 적은 교암산의 주진지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김 대위를 비롯한 중대원은 수류탄전에 이어 육박전을 감행했으나, 중앙이 돌파되는 최대의 위기에 봉착했다. 김 대위는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전 포병의 진내사격을 요청하는 한편 중대원에게 동굴
송헌주 선생은 대한제국 시기 관립 영어학교에서 수학한 후 1903년 경 하와이로 이주했다. 1906년 경 미국 본토로 건너가 프린스턴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로녹대학 재학 중이던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한국특사의 통역을 맡았다.1919년 3•1운동이 미주에 알려진 직후 선생은 하와이 한인들로부터 독립금 3만 5,000달러를 모금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외교활동 등에 사용하도록 지원했다.1937년 대한인국민회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됐으며, 대한인국민회 총회관의 건축위원장직을 맡아 LA에서 낙성식을 치렀다. 1939년
류인식 선생은 1903년 신채호 선생과의 만남 이후 교육구국운동의 필요성을 느껴 1907년 김동삼, 이상룡 선생 등과 근대적 중등교육과정인 협동학교를 설립•운영했다. ‘개벽’지에서 ‘한 사람의 힘으로 지방을 일으켰다’고 평할 정도로 선생은 신교육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 선생은 1911년 유하현 삼원포로 이주해 경학사와 신흥강습소 등 서간도 독립운동 기지 건설에 참여했다. 1912년 독립운동 자금 모집 등을 위해 일시 귀국했다가 일제에 체포된 후 국내에 머물며 다방면의 독립운동을 주도했다. 1912년부터 1920년경까지 반
심일 대위는 1950년 전쟁이 발발하자 대전차포중대 소대장으로서 춘천지구 옥산포 전투에서 자신을 포함한 5명의 특공대를 조직해 화염병과 수류탄을 들고 적의 자주포를 향해 돌진하는 육탄공격을 감행, 북한군 자주포 2대를 격파했다. 이후 1951년 1월 제7사단 수색중대장 임무 수행 중 영월전투에서 적의 총탄에 맞아 28세의 나이로 전사했다. 둘째인 심민은 경찰로 근무하며 6•25전쟁 중 치안 유지를 위해 노력했으나 32세이던 1960년 내무부 치안국 경무과 근무 중 업무 과로에 따른 심장마비로 순직했으며, 셋째인 심익은 서울
안경신 선생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평양 만세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임시정부 수립과 함께 전국적으로 항일운동단체가 조직될 때 선생은 대한애국부인회의 교통부원으로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전달하는 역할을 담당했다.그러나 대한애국부인회 조직이 일제경찰에 발각돼 더 이상 활동이 어려워지자 선생은 1920년 중국으로 망명해 임시정부의 군사기관인 광복군총영에서 활동했다. 광복군총영은 1920년 7~8월경 미국의원시찰단의 방한을 계기로 세계 여론에 한국 독립의 필요성을 호소하고자 폭탄거사를 실행키로 했다.결사대 중 제2대에 파견
미군 제213부대 600여 명의 병력으로 4,000여 명의 중공군을 상대해 치열한 전투를 벌여 진지를 완벽하게 지켜낸 전투가 있었다.1951년 5월 26일 경기 가평군 북면 홍적리에서 펼쳐진 가평전투에서 중공군 350여 명이 사망하고 830여 명이 포로가 되거나 투항한 반면, 미군 제213부대는 단 한 명의 전사자도 발생하지 않아 ‘기적의 전투’라 불리고 있다.미국 남부 유타 주에서 파병된 제213야전포병대대 600명의 부대원은 대부분 젊고, 나이 어린 병사들이었다. 1951년 5월 26일 밤, 그들은 가평으로 가서 방어선을 구축하
1950년 8월 3일부터 9월 2일까지 약 한 달에 걸쳐 계속된 다부동전투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의 파리를 지키기 위해 연합군이 펼쳤던 ‘베르뎅전투’에 비유될 만큼 처절하였을 뿐만 아니라 전략적으로 중요한 전투였다. 전쟁이 발발한 직후부터 개성, 문산, 파평산, 봉일천 일대 방어전과 음성지구전투, 화령장전투, 영강전투 등에서 싸워 온 김점곤 소장의 제12연대가 마침내 다부동에서 수세 일변도의 전세에 반격의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9월 25일부터 본격적인 반격을 시작한 제1사단은 보은-청주-안성을 거쳐 고랑포로 진격했으며, 1
조지 루이스 쇼 선생은 아일랜드계 영국인으로 중국 단둥시에서 무역 및 선박회사인 이륭양행을 운영하면서 한국의 독립운동을 적극 지원했다.쇼 선생은 이륭양행 2층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교통사무국을 설치토록 해 독립운동의 주요 거점으로 활용할 수 있게 했다. 상해를 오고 갔던 독립운동가들 중 이륭양행 소유의 선박을 이용하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쇼는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을 보호·지원해 줬다.자신의 선박으로 임시정부 요인과 무기·출판물 등을 안전하게 수송해 줬을 뿐만 아니라 독립운동 자금을 자신이 발행하는 수표로 임시정부에 송금해줬
박인호 선생은 충남 예산 출신으로 1883년 동학에 입도해 1894년 제2차 동학농민운동을 이끌었으며, 1904년 진보회를 조직해 갑진개화운동을 전개했다.1908년 선생은 천도교 4세 대도주에 임명된 후 보성학교와 동덕여학교 등을 설립해 민족의식을 갖춘 인재를 양성했다. 이후 동 학교 출신들이 3•1운동과 6•10만세운동 때 크게 활약했다. 선생은 1919년 천도교 전국 대교구에 등사인쇄기를 배치토록 해 독립선언서 제작을 지원했으며, 천도교 대교당 건축 명목으로 특별 성미를 거둬 3•1운동자금으로 사용케
1950년 6•25전쟁이 시작된 후 한 달도 안 돼 남한 대부분이 북한군에 넘어가고 광주, 순천, 광양까지 함락되던 무렵, 전남 곡성경찰서에도 ‘모두 퇴각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당시 곡성경찰서장이던 한정일 경감은 “주민을 버리고 철수할 수는 없다”면서 자발적으로 ‘곡성전투경찰대’를 조직했다. 7월 24일 경찰과 의용대원 중 자원자를 중심으로 전투가 가능한 520명을 인솔해 곡성군 태안사에 입산한 한정일 서장은 전투중대 4개 중대, 유격대 1개 중대, 정찰대 1개 소대 등으로 조직을 편성하고 인근 산악지대에 배치해 즉각적인
6·25전쟁 당시 대표적인 유격대가 바로 황해도 일대에서 활동한 구월산 유격부대이며, 그중에서도 가장 활약이 컸던 대원이 ‘구월산 여장군’ 이정숙 대장이다.이정숙 대장은 6·25전쟁 직전 공산군 손에 부모와 남편을 잃고 본인은 복역하다가 탈출, 1950년 10월 황해도 안악군에서 서하무장대를 조직해 무장대원 70여 명과 농민군을 진두지휘하며 북한군과 싸웠다.이후 서하무장대는 김종벽 대위가 이끄는 구월산 유격부대에 합류했다. 일명 동키 제2부대로도 불린 구월산 유격부대는 1950년 10월 중순, 황해도 은율군 장련면과 이도면 등의 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