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설 선생은 충남 홍성의 양반가문에서 태어나 남당 한원진의 학통을 잇는 이돈필 문하에서 수학했다. 문과에 급제하고 사간원 정언과 교리를 비롯해 동부승지 등 여러 관직을 역임했다. 정부에서 계속해 관직을 제수했으나 이를 거절하고 그때마다 상소를 올려 정국의 문제점과 방향을 비판적으로 지적했다.

선생을 비롯한 홍주지역 유생들의 사상은 위정척사론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그러나 선생의 위정척사론은 급변하는 국내외 정세에 따라 척사의 대상을 달리했다. 초기에는 소중화를 지키고 사학을 물리쳐야 한다는 입장이었으나 별자수호조약이 체결되자 이를 항복조약이라고 통박하며 척왜론을 주장했다. 1894년 갑오변란 후에는 일본과 결전을 감행하자는 ‘대일항전론’으로 확대됐다.

선생은 1894년 갑오변란에 사직한 후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항거해 홍주의병에 참여했으나 반역자의 밀고로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05년 을사조약이 늑결되자 김복한과 함께 상경해 매국적을 처단하고 일본과의 전쟁을 감행할 것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리다 또 다시 옥고를 치렀다. 선생은 석방된 이후에도 항일투쟁에 매진했으나 옥고의 후유증으로 순국했다.

선생은 척왜론과 대일결전론을 실천에 옮긴 관료이자 현실비판적인 유학자였다. 동시에 민족적 위기에서 일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항일구국투쟁에 헌신한 민족운동가였다. 이에 정부는 1963년 선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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