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인호 선생은 충남 예산 출신으로 1883년 동학에 입도해 1894년 제2차 동학농민운동을 이끌었으며, 1904년 진보회를 조직해 갑진개화운동을 전개했다.

1908년 선생은 천도교 4세 대도주에 임명된 후 보성학교와 동덕여학교 등을 설립해 민족의식을 갖춘 인재를 양성했다. 이후 동 학교 출신들이 3•1운동과 6•10만세운동 때 크게 활약했다. 선생은 1919년 천도교 전국 대교구에 등사인쇄기를 배치토록 해 독립선언서 제작을 지원했으며, 천도교 대교당 건축 명목으로 특별 성미를 거둬 3•1운동자금으로 사용케 했다.

선생은 3•1운동을 전국으로 확산시키기 위해 ‘조선독립신문’을 발간하는 등 배후에서 만세운동을 지휘하다 일제로부터 기소돼 1년 9개월 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도 상해와 북경의 천도교 전교실을 통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독립운동 자금을 제공했다.

선생은 1926년 6•10만세운동 때 격고문과 전단 등 5만 매를 배포토록 했으며, 1927년 천도교 출신 청년과 교인들이 전국 신간회에서 활동하도록 지시했다. 또 1936년 지방에서 상경한 천도교 지도자들에게 일제의 패망을 재촉하는 기도를 올린 것이 밝혀져 1938년 일제로부터 조사를 받기도 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적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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