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25전쟁이 시작된 후 한 달도 안 돼 남한 대부분이 북한군에 넘어가고 광주, 순천, 광양까지 함락되던 무렵, 전남 곡성경찰서에도 ‘모두 퇴각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당시 곡성경찰서장이던 한정일 경감은 “주민을 버리고 철수할 수는 없다”면서 자발적으로 ‘곡성전투경찰대’를 조직했다. 7월 24일 경찰과 의용대원 중 자원자를 중심으로 전투가 가능한 520명을 인솔해 곡성군 태안사에 입산한 한정일 서장은 전투중대 4개 중대, 유격대 1개 중대, 정찰대 1개 소대 등으로 조직을 편성하고 인근 산악지대에 배치해 즉각적인 출동이 가능하도록 조치했다.

한 경감은 북한군 3개 중대를 상대로 벌인 치열한 전투 끝에 적군 52명을 사살하고 아군은 1명만 사망하는 전과를 올렸다. 타격을 입은 적군이 다시 압록교를 넘기까지는 일주일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그러나 전투경찰대의 피해도 컸다. 8월 6일 북한군 1개 연대의 기습 반격으로 인해 태안사에서 48명의 경찰관이 전사하고 200여 명이 다치는 큰 피해를 입게 된다. 이에 전남 광양 백운산으로 철수한 한정일 서장은 다시 잔여 대원들을 중심으로 전열을 정비하고 북한군의 보급로를 기습했다.

한정일 서장이 이끈 곡성전투경찰대는 전쟁 초기 유격전이 국군 낙오병과 일반인에 의해 수행됐던 것과 달리 조직력을 갖추고 자발적으로 적진에 남아 유격전을 전개했다는 점과 압록교 전투를 대표적인 경찰 승전 기록으로 평가받고 있다.


◆ 최근 신문 PDF보기 ◆

 

저작권자 © 나라사랑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