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일 대위는 1950년 전쟁이 발발하자 대전차포중대 소대장으로서 춘천지구 옥산포 전투에서 자신을 포함한 5명의 특공대를 조직해 화염병과 수류탄을 들고 적의 자주포를 향해 돌진하는 육탄공격을 감행, 북한군 자주포 2대를 격파했다. 이후 1951년 1월 제7사단 수색중대장 임무 수행 중 영월전투에서 적의 총탄에 맞아 28세의 나이로 전사했다.

둘째인 심민은 경찰로 근무하며 6•25전쟁 중 치안 유지를 위해 노력했으나 32세이던 1960년 내무부 치안국 경무과 근무 중 업무 과로에 따른 심장마비로 순직했으며, 셋째인 심익은 서울고 재학 중에 전쟁이 일어나자, 만 17세의 나이에 학도병에 자원해 낙동강 방어전투에 참전했다가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

이들은 모두 조보배 여사의 아들이었다.

조 여사는 3형제에게 어려서부터 개인의 안위보다는 국가를 위해 먼저 희생할 수 있도록 가르쳤고,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주저 없이 나가 싸울 수 있는 투철한 국가관이 확립되도록 교육했다.

조 여사는 세 아들을 모두 나라에 바친 이후에도 나라를 위한 아들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평생을 봉사와 사회활동에 헌신했다.

조 여사는 강원도 일대 수만 평의 임야를 개간해 이를 무의무탁 제대군인들에게 삶의 터전으로 제공했으며, 개인의 땅을 현충탑 부지로 기증하기도 했다.

“국가가 있어야 자식도 있다”. 일생을 조국에 헌신한 삶을 산 조보배 여사가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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