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윌리엄 해밀턴 쇼

미국인 선교사 부부의 아들로 평양에서 태어난 윌리엄 해밀턴 쇼는 자신을 한국인이라 생각했고 한국을 조국으로 여겼다. 평양에서 고등학교를 마쳐 유창한 한국어 실력을 갖췄으며 한국인 친구들도 많았다. 미 해군에 입대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노르망디 상륙작전에도 참전했던 쇼 대위는 1947년 전역 후 한국으로 돌아와 미 군정청 소속으로 ‘조선 해양경비대사관학교(현 해군사관학교의 전신)’에서 교관으로 근무하며 생도들을 가르쳤다.

교관 근무 중 학업에 뜻을 품고 미국으로 건너가 하버드에서 철학 박사학위과정을 진행하다가 6·25전쟁이 발발하자 곧바로 ‘제2의 조국’인 한국의 평화와 자유를 지키겠다며 미 해군에 재입대했다.

그는 한국어와 한국지리에 정통했기 때문에 맥아더 장군의 최측근 보좌관인 해군정보장교로 임명돼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또 작전 완수 후에는 다시 자원해 미 해병대 5연대에 배속돼 서울탈환작전에 직접 참전했다.

1950년 9월 22일 아침 쇼 대위는 적 후방 정찰을 위해 녹번리(현 서울 은평구 녹번동)에 접근했고, 이때 기관총으로 중무장한 적 매복조의 공격을 받아 28세의 꽃다운 나이에 전사했다. 유엔군은 그가 전사하고 일주일 후 서울 탈환에 성공했다.

전사하기 일주일 전 인천상륙작전에 함께 참전했던 그는 “나도 한국에서 태어났으니 한국 사람입니다. 내 조국에서 전쟁이 났는데 어떻게 마음 편하게 공부만 하겠습니까? 공부는 내 조국에 평화가 온 다음에 해도 늦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해밀턴 쇼 대위는 우리 정부로부터 충무무공훈장을 미국 정부로부터는 은성무공훈장을 각각 추서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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