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38선을 넘어 북진했던 유엔군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다시 서울을 내주고 말았다. 재정비를 마친 유엔군은 반격에 나서 한강 남안에서 대관령까지 전선을 회복했으나 중공군이 대병력을 중동부 전선에 투입하면서 교통과 병참의 요충지인 지평리에서 일대 격전이 벌어졌다. 유엔군은 1개 연대에 불과한 병력으로 중공군 4개 사단의 인해전술 공격을 격퇴했고 이 전투의 승리로 아군은 38선 회복의 결정적 계기를 마련했다.지평리 전투는 1951년 2월 중공군 제4차 공세 시 미 제2사단 23연대가 프랑스 대대, 국군1유격중대와 함께
성큼 다가온 여름을 맞아 거리의 가로수마다 초록의 새 잎들을 무성하게 뽐낸다. 초여름을 맞는 서울 강동구 중앙보훈병원의 호스피스병동은 예의 차분한 모습이다. 병동 조금 외진 곳에 자리잡은 목욕실에서 도란도란 담소를 나누는 목소리가 문틈으로 흘러나온다. 환우들에게 목욕봉사를 하고 있는 김화선 자원봉사자(74)를 만났다.“목욕봉사를 하는 화요일은 일주일 중 제가 가장 손꼽아 기다리는 날입니다. 의사는 의사의 일을, 간호사는 간호사의 일을, 자원봉사자들은 그 사이 어느 빈틈 환우의 마음을 보듬는 역할을 하는 것이지요. 그 맡은 일에 최선
인천상륙작전은 북의 남침으로 백척간두에 놓였던 전세를 역전시킨 결정적인 작전이었다. 인천상륙작전은 ‘성공확률 5,000대 1’이라 예견됐던 사실상 도박에 가까운 결단이었지만 이 작전의 성공으로 북한군은 허를 찔렸고 전쟁의 흐름은 완전히 아군에 넘어왔다. 상륙에 성공한 아군은 곧바로 서울을 수복했고 힘겹게 낙동강 전선을 사수하던 국군과 유엔군은 대반격에 나서 38선을 넘어 북진의 기세를 잡을 수 있었다.맥아더 장군 ‘인천’이 최적지 확신1950년 6월 28일 서울이 함락되고 북한군의 진격이 가속화되자 한강 방어선을 시찰한 맥아더는 7
남겨진 전몰·순직군경의 어린 자녀들을 돕기 위해 지난달 출범한 ‘히어로즈 패밀리’ 멘토단에 남다른 사연을 가진 멘토가 참여했다. 사연의 주인공은 연평도포격전 전사자 고 서정우 하사의 모친인 김오복 전 교장(63, 광주 대성여자고등학교). 출범식 다음 날, 봄 햇살 가득 비치는 광주광역시 자택에서 김오복 교장을 만났다.전날 출범식을 다녀왔지만 피곤함도 잊은 채 이 일의 중요성을 펼쳐놓는 김오복 교장의 표정이 밝다.“아들에 대한 그리운 마음이 북받칠 때마다 남몰래 기도하며 많이 울기도 했어요. 아들에 관한 기사가 실리면 모두 스크랩하고
국가보훈부 승격을 계기로 보훈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이 높아지는 가운데 국내외 봉사활동 등 사회공헌에 ‘진심’인 대한민국전몰군경미망인회 강길자 회장을 만났다.미망인회는 남편을 조국에 바치고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꿋꿋이 살아가고 있지만 이젠 이웃으로 눈을 돌려 ‘함께 사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 단체의 핵심과제라고 믿고 있다.“우리 회원들은 남편을 잃은 아픔 속에서도 자녀를 키우며 가정을 지켜왔을 뿐만 아니라 이제는 똘똘 뭉쳐서 세상을 밝게 만드는 일에 앞장서고자 합니다.”그 대표적인 일이 바로 동병상련의 아픔을 갖고 있는 에티오피아 강
작열하는 태양과 포탄의 화염으로 대지가 녹아내리던 1950년 8월의 낙동강 전선. 북한군은 전차를 앞세운 5개 사단을 투입해 파상공세를 가했고 이를 방어하는 한미연합군은 보병, 전차, 포병, 항공이 연결된 입체적 방어전을 펼쳐 북한군을 저지했다. 여기서 밀리면 끝장이라고 생각한 지역의 주민들도 남녀노소, 너 나 할 것 없이 힘을 보탰다. 다부동 전투는 사투 끝에 낙동강 방어선을 지켜내고 인천상륙작전으로 이어지는 반격의 발판을 마련해 최대 고비를 극복한 6·25전쟁의 결정적 장면 중 하나가 됐다.6·25전쟁이 발발하고 채 한 달도 지
가로수 가지마다 작은 꽃들이 고개를 들며 봄기운이 가득하다. 어느덧 완연해진 봄을 느끼며 서울 역삼동의 한 스튜디오에서 국가유공자를 위한 기부와 봉사에 앞장서온 유튜브 크리에이터(유튜버) 에이전트에이치(H), 황지훈(36)씨를 만났다. 그는 지난 2월 23일 서울남부보훈지청 6·25전쟁 정전 70주년 명예 홍보대사로 임명된 후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막중한 책임감을 느낍니다. 올해 6·25전쟁 정전 70주년을 홍보하고, 국가유공자분들의 희생과 헌신을 널리 알리는데 최선을 다하겠습니다.”인사
우리 전생사의 주요 페이지를 차지하는 춘천 전투는 6·25전쟁 개전 초기, 파죽지세로 내려오던 북한의 고속기동부대를 저지해 북한군의 초기 작전계획을 좌절시키고, 국군이 전열을 재정비해 한강방어선을 형성할 시간을 확보한 역사적 전투로 기록된다. 병력과 장비의 절대적 열세를 극복하고 전쟁의 흐름을 바꾼 춘천 전투의 전개 과정과 그 의미를 짚어본다.1950년 6월 25일 새벽, 38도선을 따라 배치돼 있던 북한군의 야포들이 남쪽을 향해 일제히 사격을 시작하면서 북한군의 전면 남침이 시작됐다. 소련으로부터 지원받은 티34(T-34) 전차
함경남도 북청, 부산 동래와 더불어 항일운동 3대 성지라 불리는 전남 소안도. 일제강점기 시절 6,000여 명의 주민 중, 800여 명이 ‘불령선인’으로 지목될 정도로 항일운동의 불길이 거세게 타오른 곳이다. 삼천리 방방곡곡 태극기 손에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던 3월, 독립운동가들의 나라사랑 정신을 이어가고 있는 ‘태극기의 섬’의 소안항일운동기념사업회 김광선(67) 회장을 만났다.전라남도 완도군 화흥포항에서 뱃길로 한 시간 거리에 위치한 소안도. 항일운동 3대 성지답게 ‘대한’ ‘민국’ ‘만세’라는 이름을 가진 세 척의 배가 육지
전쟁은 비극이었고, 참화였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그 전쟁을 딛고 일어서 오늘의 자랑스러운 선진 대한민국을 일궈냈다. 전쟁이 멈춘 지 70년, 포화는 멈췄지만 긴장은 쉴 새 없이 이어졌다. 우리는 때로는 대결로, 때로는 대화로 한반도의 위기를 기회로 바꾸어 놀라운 대한민국의 역사를 써왔다. 정전70주년 슬로건 ‘위대한 헌신으로 이룬 놀라운 70년’이 그 내용을 압축해서 표현하고 있다. 우리 신문은 이번호부터 국방부 군사편찬위원회와 공동기획으로 ‘튼튼한 안보, 평화와 미래를 위한 전진’을 싣는다.논어 위정편의 “칠십이종심소욕불유구(七十
정오의 햇볕처럼 따스한 손길로 매년 형편이 어려운 참전유공자를 돕는 사람이 있다. 벌써 5년째 자신의 보훈급여금 등을 모아 매년 1,000만 원씩 경남동부보훈지청을 통해 저소득 보훈대상자 10가구를 지원하고 있는 월남전참전유공자 김상길(81)씨를 만났다.김상길씨는 월남전참전용사이자 상이군인이다. 그는 1965년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해병대 소위로 임관한 이듬해 월남전에 참전했다. 소대장으로 전선에 선지 7개월 만에 적의 총탄에 어깨가 관통되는 큰 부상을 입었다.“의사 말로는 총알이 관통한 곳이 심장에서 10센티미터 떨어진 위치로
지난 10월 경주시보훈회관에 반가운 손님들이 찾아왔다. 바로 경북남부보훈지청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기자단 ‘보훈프렌즈’ 대학생들이다. 국가유공자와 이야기콘서트부터 제대군인주간과 유엔참전용사 추모의 날 홍보, 사랑의 연탄나눔을 통한 훈훈한 겨울나기 프로젝트까지 국가유공자 곁에서 최근까지 다채로운 활동을 해온 보훈프렌즈 박용흠(24), 이예림(23) 씨를 만났다.‘보훈프렌즈’라는 이름에는 SNS를 통한 홍보는 물론 국가유공자와 직접 소통하는 활동을 더해 보훈가족 곁으로 다가간다는 의미가 담겼다.보훈프렌즈 1기의 대표를 맡은 박용흠
지난 9월 늦더위가 기승을 부려 습하고 더운 날씨가 이어지는 가운데 20~30대의 젊은 청년 60여 명이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을 찾았다. 이들은 엠지(MZ)세대 봉사단체 ‘연봉인상단(‘연마다 봉사를 늘린다’의 줄인 말)’ 봉사자들로, 한국광복군 창설기념일을 맞아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을 모신 묘역 등 1700여 위의 묘비를 닦고 주변 환경을 깨끗이 정화했다. 꾸준히 봉사의 길을 확장해 온 두 사람, ‘연봉인상단’의 이한준(28) 대표와 운영진으로 활동하고 있는 서재덕(31) 단원을 만났다.엠지세대 봉사단체 ‘연봉인상단’의 시작이
배철웅 4·19혁명공로자회 이사“보훈부 승격, 좋은 일은 서둘러야”미국은 ‘천조 국가'라고 합니다. 하늘이 도우신다는 천조(天助)가 아니라 방위비 예산이 1,000조원 규모이기 때문에 그렇게 부릅니다. 더욱 놀랄 일은 그들의 보훈예산이 방위비의 절반 수준이란 점입니다. 미 국가보훈부의 2022년도 연간 예산요구액은 3,024억 달러로 우리 돈 360조원이 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도 국격에 걸맞는 보훈문화를 위해 미국의 사례를 참고할 필요가 있습니다.독립운동, 6·25전쟁과 월남전, 4·19혁명에서 5·18까지 나라와 민족을
한미동맹은 한반도 평화 정착과 역내 자유민주주의 발전의 관건이다. 대한민국은 한미동맹을 통해 튼튼한 안보를 구축했고, 우리는 이를 토대로 성장 발전해 세계 10대 교역국의 지위에 올랐다. 최근 급변하는 동북아 질서는 다시 한미동맹의 중요성과 그 역할에 대해 주목하고 있다. 지난달 25일 한미동맹재단과 주한미군전우회가 함께 '한미동맹 국제학술회의'를 열어 '한미동맹 강화 및 한반도 평화 정착 방안'과 '우리나라 국제보훈의 방향'을 심도 있고 논의했다. 이날의 주제발표 내용과 주요 논의를 요약 정리한다. 박민식 국가보훈처장 환영사한미동
1. 국제보훈사업 현황국제보훈의 대표 사업인 유엔참전용사 재방한 사업은 참전용사를 대한민국으로 초청해서 이분들이 목숨 바쳐 지켰던 나라가 어떻게 변모했는지 보여드리면서, 이분들께 자부심과 보람을 드리기 위한 사업이다. 이 사업은 1975년부터 시작돼 지금까지 모두 3만3,554명의 참전용사와 가족이 참여했다. 이와 함께 해외를 직접 찾아가는 현지 위로·감사 행사도 계속 진행하고 있다.매년 7월 27일에는 유엔군참전의날 기념식, 11월 11일에는 6·25전쟁 당시 전사한 분들이 잠들어 계신 유엔 묘지를 향해서 묵념하는 ‘턴투워드 부산
서울 송파구 ㅅ병원 장례식장. 올해 95세로 별세한 한 6·25참전유공자의 장례식이 한창인 가운데, 정복차림에 대통령 근조기와 태극기 등을 든 대한민국무공수훈자회 장례의전선양단이 대열을 맞춰 고인의 영정 앞에 섰다. 그 대열의 가장 앞에서 김동진(74) 장례의전선양단 행사지원대장이 절도 있게 거수경례를 하고 있다. 그 손끝에는 고인이 된 참전유공자에 대한 깊은 경의와 함께 무공수훈자로서의 자부심이 담긴 듯 했다.2013년 대한민국무공수훈자회 산하 봉사단으로 창단된 장례의전선양단. 국가유공자의 마지막을 명예롭게 지킨다는 취지로 시작한
목숨을 바쳐 나라를 지킨 사람(1) 경찰6·25전쟁 중 경찰은 군인과 함께 전투를 치르거나 각자 근무하던 지역에서 북한군과 싸웠다. 당시 전쟁에 참여한 경찰력은 6만 3,000여 명으로 그중 1만여 명이 사망하고 6,900여 명이 부상당했다.- 내평지서(지구대) 전투1950년 6월 25일 전쟁 발발 당일 춘천의 내평지서에서 근무하던 노종해 지서장과 대한 청년단원 3명 등 12명이 압도적 화력과 병력으로 공격을 퍼붓는 북한군과 1시간 이상 교전하며 북한군의 남하를 지연시켰다. 노종해 지서장을 비롯한 경찰관과 청년단원 9명이 전사했다.
지난달 5일 서울 마포구 한국 성니콜라스대성당. 엄숙한 분위기 가운데 대학생 2명이 단상에 올랐다. 니콜라오스 카르달리아스 그리스 국방차관, 암브로시오스 조그라포스 한국정교회 대주교 등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두 사람은 진심을 담은 목소리로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한국외국어대학교 그리스·불가리아학과 심예원(23), 김소민(21) 학생이 그리스 참전용사를 위해 진심을 다해 쓴 감사편지가 낭독되고 있었다.“빛나는 청춘을 포기하고 포화 속으로 뛰어들었던 당신의 용기를 우리는 잊지 않을 것입니다. 저희에게 ‘현재’라는 선물을 준 그리스
6·25전쟁의 배경과 전개 과정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국제적인 냉전이 고조되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1948년 남과 북에 각기 분단 정부가 세워지고, 1950년 북한이 무력 남침을 감행함으로써 한반도는 순식간에 전쟁터로 변했다. 냉전 속의 열전이었다. 6·25전쟁은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기습 남침으로 시작되어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성립되기까지 3년간 계속되었다.(1) 6·25전쟁의 배경1948년 남과 북에 분단 정부가 수립된 후 미군과 소련군이 모두 철수했다. 이후 38선 인근에서 남북 간에 크고 작은 군사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