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상륙작전은 북의 남침으로 백척간두에 놓였던 전세를 역전시킨 결정적인 작전이었다. 인천상륙작전은 ‘성공확률 5,000대 1’이라 예견됐던 사실상 도박에 가까운 결단이었지만 이 작전의 성공으로 북한군은 허를 찔렸고 전쟁의 흐름은 완전히 아군에 넘어왔다. 상륙에 성공한 아군은 곧바로 서울을 수복했고 힘겹게 낙동강 전선을 사수하던 국군과 유엔군은 대반격에 나서 38선을 넘어 북진의 기세를 잡을 수 있었다.

맥아더 장군 ‘인천’이 최적지 확신

1950년 6월 28일 서울이 함락되고 북한군의 진격이 가속화되자 한강 방어선을 시찰한 맥아더는 7월 말경 사단 규모의 병력을 인천에 상륙시켜 조기에 전쟁을 승리로 종결짓겠다는 구상을 세웠지만 전선 상황의 급속한 악화로 7월 투입은 취소되고 말았다.

그러나 태평양 전선에서 일본을 상대로 벌인 수많은 상륙작전에서 모두 승리한 상륙전의 달인 맥아더 장군은 좁은 수로, 유난히 높은 조수 간만의 차 등등 인천이 가진 몇 가지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인천상륙이야말로 단숨에 전세를 역전시킬 유일한 방법이라 확신했다. 북한군 주력이 낙동강 전선에 몰려 있는 상황에서 교통의 요지인 서울을 빠른 시간에 점령해 북한의 병참선을 끊는다면 허리를 잘린 북한군이 버티지 못할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서울에서 가까운 인천이 최적지였다. 군산과 주문진 등 다른 지역을 상정한 상륙작전도 구상됐지만 결국 인천에 상륙하는 100-B 작전이 최종 승인됐다. 크로마이트작전이라고 명명된 이 작전의 디데이(D-Day)는 9월 15일이었다.

인천상륙작전을 실행할 제7합동기동부대는 미 제7함대 세력을 주축으로 한 유엔군 261척의 함정과 미 제10군단 예하 한국군 2개 연대를 포함한 미군 2개 사단 등 총 병력 7만여 명으로 구성됐다. 작전의 결행을 앞두고 북한이 계획을 눈치채지 못하도록 대규모 기만 작전이 펼쳐졌다. 인천상륙작전 이틀 전에는 인천을 비롯해 군산, 삼척, 마량도(함경남도) 등 주요 해안에서 대규모 폭격을 실시했다.

또한 사전 정지 차원에서 9월 10일부터 미 해군과 공군은 월미도를 비롯해 인천지역에 대대적인 폭격을 가해 인천상륙에 방해가 될만한 주요 시설을 철저히 파괴하며 작전을 준비했다.

함정 261대, 병력 7만여 명 투입

9월 15일 자정 선견공격전대가 구축함들을 선두로 인천수로에 진입했다. 선견공격전대 함선에는 최초 상륙돌격을 감행할 미 제5해병연대 제3대대가 탑승하고 있었다. 이들을 선도 호위하는 구축함과 순양함 외에도 맥아더 장군이 동승하고 있는 제임스 도일(James H. Doyle) 제독의 기함 마운트 매킨리호도 여기에 합류했다.

오전 5시 45분경 구축함이 월미도에 포격을 시작했고, 이로부터 30분이 지난 6시 15분 로켓포함이 해안에 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로켓포함이 월미도에 포격을 가하는 동안 상륙정에 탑승한 미 제5해병연대 제3대대가 공격 개시선을 통과, 오전 6시 33분에 월미도 해안에 상륙했고, 이어 제2상륙부대와 제3상륙부대도 월미도 해안에 차례로 상륙했다. 이들은 북한군의 수류탄 공격을 받기도 했으나, 미미한 수준이었다.

소월미도에 대한 공격은 오전 10시경에 시작됐다. 월미도 남쪽 1킬로미터 정도의 방파제로 연결된 소월미도는 약 1개 소대의 북한군 병력이 방어하고 있었다. 제5해병연대 제3대대의 1개 소대가 공격해 1시간에 걸친 격전 끝에 이를 확보했으며 월미도와 소월미도 소탕작전은 정오경 완전히 정리됐다.

월미도의 상륙작전 성공 이후 공격 부대 사령관 도일 소장은 오후 2시 45분 상륙부대의 상륙을 명령했다. 여기에 미 제5해병연대와 이에 배속된 한국 해병 제3대대, 미 제1해병연대가 참여했다. 이들은 500정이 넘는 상륙 주정과 수륙양용 차량에 탑승해 상륙 준비를 완료했다.

허 찔린 북한, 지리멸렬 패주

미 제5해병연대와 한국해병 제3대대는 적색해안, 즉 인천과 월미도로 이어지는 방파제 북쪽으로 상륙해 인천역 및 지금의 자유공원 지역을 점령하는 것이 주임무였다. 상륙 제1파는 차량 및 병력 상륙정 4척으로 구성돼 있었다. 미리 월미도에 상륙한 제3중대에서 박격포로 엄호사격을 하고 함포 사격과 미 해병대 전투기들이 연속적으로 급강하 사격을 하며 방파제 뒤에 숨은 북한군을 공격하는 가운데, 해병대원이 탑승한 상륙 주정이 해안에 도착했고 이들은 빠르게 해안을 점령해 나갔다. 인천 곳곳에 위치한 벙커에서 저항하던 북한군은 압도적인 화력에 밀려 소탕됐고, 미군은 인천항 도크를 손쉽게 확보했다.

청색해안으로의 상륙작전 임무를 부여받은 미 제1해병연대는 서울로 향하는 경인가도가 위치한 동인천역 및 수봉산 지역 쪽으로 상륙하는 것이 주임무였다. 조류의 영향으로 상륙에 어려움을 겪었지만 9월 16일 새벽 1시 목표 지역 점령에 성공했다.

인천항을 확보함에 따라 공격부대와 함께 지원부대의 상륙도 순조롭게 이뤄졌다. 9월 15일에만 약 1만 3,000명의 병력과 450대의 차량을 포함한 장비와 보급품이 서울 수복 작전에 투입됐다.

공세 전환 아군, 38선 넘어 북진

아군은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을 거둔 후, 김포-부평으로 작전 지역을 전개해 서울로 향하는 교두보를 확보했고 9월 28일 마침내 서울을 수복했다. 인천상륙작전의 한국군 총책임자였던 손원일 제독은 직접 해병대원 복장을 하고 서울 수복까지 함께했다. 병사에서 최고 지휘관이 이르기까지 일심으로 단결했기에 위대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이다.

인천상륙작전은 성공적인 작전이었으나 피해가 없지는 않았다. 인천으로부터 서울에 이르는 동안 미군은 전사자 415명, 부상자 2,029명 및 실종자 6명의 손실을 보았으며, 한국해병대는 전사자 7명, 부상자 300명, 실종자 16명의 피해를 보았다. 한국군과 유엔군의 총 손실은 약 4,000명이 넘은 것으로 집계됐다. 아군은 북한군 사살 14,000명, 포로 7,000명과 적의 전차 50여 대를 파괴하는 등 상당한 전과를 얻었다.

한편 낙동강 전선에 묶여 있던 북한군의 주력은 보급로는 물론 퇴로까지 잃게 돼 전의를 상실하고 급속히 와해됐다. 지리멸렬해진 북한군 일부는 동해안 산악지대를 타고 퇴각했으며 일부는 지리산으로 숨어들었고 나머지는 포로 신세가 됐다.

이처럼 세계 전사상 가장 성공적인 상륙작전이라고 평가를 받는 인천상륙작전의 성공 요인은 바로 전격적인 기습에 있었다. 북한은 아군이 여러 가지 악조건을 가지고 있는 인천에 상륙하리라 예상하지 못하고 오히려 인천 배후에 있는 예비사단을 낙동강 전선으로 이동시키는 등 실책을 연이어 범하고 말았다.

아군은 예상하지 못한 순간, 예상하지 못한 곳에 치명적인 일격을 가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인천상륙작전은 6·25전쟁의 전세를 완전히 뒤바꾸었다는 것과 함께 북진을 통한 북한으로의 반격을 가능하게 했다는 점에서 특별한 전사적 의의를 갖는다.

이상호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에는 261대의 함정과 500여 대의 상륙주정이 동원됐다. 해안방벽을 발도메로 로페즈 중위가 사다리를 이용해 오르고 있다.

인천상륙작전을 총지휘한 맥아더 장군이 기함 마운트 매킨리호에서 작전을 지휘하고 있다(왼쪽, 미육군 자료사진). 2016년 인천광역시 월미도에서 열린 제66주년 인천상륙작전 전승행사에서 육·해·공군·해병대와 미군이 인천상륙작전을 재연하고 있다(오른쪽).

인천상륙 성공의 숨은 힘, 엑스레이·트루디 잭슨 작전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적정 파악과 함께 상륙 함대를 유도할 팔미도 등대 점등이 반드시 필요했다. 그래서 추진된 것이 바로 엑스레이 작전과 트루디 잭슨 작전이었다.

엑스레이 작전은 인천지역 북한군 배치 현황, 보급선, 해로의 기뢰매설 여부, 상륙지점 지형, 인천항 안벽 높이, 북한군 방어진지 등 인천과 월미도를 중심으로 한 서해안 일대의 적정을 수집해 보고한 작전으로 이희정 중령이 지휘한 한국군 해군 육전대와 함명수 소령이 지휘한 첩보부대에 의해 실시됐다.

상륙 작전 하루 전인 9월 14일 북한군 1개 대대가 영흥도를 기습하며 작전이 수포로 돌아갈 수도 있는 위기를 맞았다. 이때 첩보대의 임병래 중위와 홍시욱 하사가 적을 유인해 부대원들을 탈출시킨 뒤 총으로 자결했다. 포로가 되면 상륙 작전 정보가 새 나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들이 피를 흘리며 수집한 정보는 극동군사령부 첩보부대인 클라크 첩보대에 전달돼 팔미도 등대 점등 작전인 트루디 잭슨 작전에 활용된다.

클라크 첩보대는 9월 10일 팔미도 무인등대의 작동여부를 확인하는 한편 9월 15일 지정된 시간에 맞춰 팔미도 등대를 점등하는 작전을 성공시켰다. 점등된 등대 신호를 따라 유엔연합군 함대가 비어수로를 통해 인천항에 접근, 상륙작전을 개시할 수 있었다.

이처럼 대규모의 인천상륙작전 배후에는 이 작전의 성공을 위해 특수작전을 수행한 한미 양국 첩보부대와 켈로(KLO)부대의 활약이 있었다. 또한 해군 첩보부대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영흥도의 무명 한국 청년단원들도 활약을 빼놓을 수 없다. 이들 모두의 활약으로 인천상륙작전은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역사의 증인 인천상륙작전기념관

인천 연수구 인천상륙작전기념관 내부 전시실.
인천 연수구 인천상륙작전기념관 내부 전시실.

인천상륙작전이 펼쳐졌던 해안가에는 인천상륙작전기념관이 세워져 그날을 기억케 한다.

인천광역시 연수구 옥련동에 자리한 기념관은 6·25전쟁 당시 구국의 계기가 됐던 인천상륙작전의 역사적 사실을 기념하고 보존하기 위해 1984년 9월 15일 건립됐다.

기념관 입구에서 만나는 6·25참전국가의 상징조형물을 지나면 인천상륙작전의 최초 구상과 발전단계, 계획, 작전의 진행과정 등을 설명하는 전시물을 볼 수 있다. 또한 인천상륙작전 관련 유물 및 문서자료, 디오라마, 6·25전쟁 당시 남북한이 사용했던 무기와 기타 유물들이 전시돼 있어 그날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전시관을 지나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전투장면을 부조로 새긴 조각물을 만난다. 언덕에는 자유수호의 탑이 적진을 향해 돌격하는 군인들의 모습을 형상화한 청동상과 함께 우뚝 서 있다.

또한 기념관에는 상륙주정에 내려서 사다리를 들고 해벽을 올라가는 미해병대원의 모습을 담은 동상을 비롯해 여러 동상과 기념물들이 있어 그날의 현장을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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