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열하는 태양과 포탄의 화염으로 대지가 녹아내리던 1950년 8월의 낙동강 전선. 북한군은 전차를 앞세운 5개 사단을 투입해 파상공세를 가했고 이를 방어하는 한미연합군은 보병, 전차, 포병, 항공이 연결된 입체적 방어전을 펼쳐 북한군을 저지했다. 여기서 밀리면 끝장이라고 생각한 지역의 주민들도 남녀노소, 너 나 할 것 없이 힘을 보탰다. 다부동 전투는 사투 끝에 낙동강 방어선을 지켜내고 인천상륙작전으로 이어지는 반격의 발판을 마련해 최대 고비를 극복한 6·25전쟁의 결정적 장면 중 하나가 됐다.

6·25전쟁이 발발하고 채 한 달도 지나지 않은 7월 20일, 대전과 전주가 북한군에게 점령된 뒤 23일 광주, 26~27일 여수 점령 등 대한민국의 방어선은 계속 동남으로 밀려나 낙동강 전선까지 후퇴한다. 이 시기 북한은 대한민국의 90%를 점령하고 마지막 남은 대구와 부산마저 손에 넣고자 거센 파도처럼 밀어부치고 있었다.

7월 20일, 김일성은 충남 수안보에 설치된 북한군 전선사령부까지 내려와 “8월 15일까지는 반드시 부산을 점령하라”고 독촉했고, 전선 돌파를 위해 전력을 쏟아부은 북한군은 1950년 8월 1일 진주-김천-점촌-안동-영덕을 연결하는 선까지 진출해 대구를 위협하고 있었다. 국군으로서는 최대 위기였다.

국군이 328고지 부근에서 작전 지휘를 하고 있다. 11일간의 전투에서 고지의 주인이 15번이나 바뀔 정도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국군이 328고지 부근에서 작전 지휘를 하고 있다. 11일간의 전투에서 고지의 주인이 15번이나 바뀔 정도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전략적 요충지인 다부동

낙동강 방어선은 왜관 칠곡을 기점으로 동북쪽은 국군이, 서남쪽은 미군이 맡았다. 최후의 배수진에서 벌어진 전투인 만큼 전투는 지속적이고 치열했다. 가장 치열했던 곳은 서북쪽 북한군 지역에서 대구로 가는 길목인 왜관 동북쪽 다부동이었다.

경상북도 칠곡군에 위치한 다부동은 대구 방어에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다부동은 대구에서 북쪽으로 22킬로미터 떨어져 있으며, 상주와 안동에서 대구에 이르는 5번 도로와 25번 도로가 합쳐지고, 왜관에 이르는 997번 지방도로가 시작되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1950년 8월 23일. 아군은 8번의 공격 끝에 유학산 점령에 성공했다. 치열한 교전으로 초토화된 유학산 고지에서 포연이 솟아오르고 있다
1950년 8월 23일. 아군은 8번의 공격 끝에 유학산 점령에 성공했다. 치열한 교전으로 초토화된 유학산 고지에서 포연이 솟아오르고 있다

다부동을 중심으로 북서쪽에는 유학산이, 그 동쪽에는 지역 내에서 가장 높은 가산이 있어 북한군을 방어하기에 유리한 지형이었다. 다부동 지역이 돌파되면 10킬로미터 남쪽의 도덕산 일대까지 철수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대구가 북한군 포병사격의 사정권 내에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다. 이곳은 수비하는 국군 입장에서도 반드시 지켜야 하는 공간이었다.

다부동 전투의 전개과정

북한군은 1950년 8월 13일 부산과 대구로 통하는 교두보를 마련하기 위해 대구 공격에 투입된 5개 사단 중 제1사단, 제13사단, 제15사단과 제105전차사단을 대구 축선에 집중시켜 공격했다. 이에 따라 아군은 왜관-낙정리 일대에 국군 제1사단, 낙정리-의성 일대에 국군 제6사단, 현풍-왜관 일대에 미 제1기병사단 등 3개 사단을 배치했다. 국군 제1사단 중앙의 제12연대는 북한군 제15사단이 점령하고 있던 유학산을 탈환하기 위해 14일부터 치열한 공방을 벌이고 있었다.

8월 15일을 전후로 대구 북방의 위기는 절정에 달했다. 국군 제1사단 우측의 국군 제6사단은 좌측의 제7연대가 15일 오전에 북한군 제1사단으로부터 공격을 받아 한때 매봉산 남서쪽 3킬로미터 지점인 373고지를 빼앗겼지만, 포병과 항공화력의 지원 아래 원래의 진지를 회복한 후 혈전을 거듭했다.

왜관 지역을 담당하던 미 제1기병사단은 좌측의 제7기병연대가 14일 새벽에 낙동강을 건너 넘어온 북한군 제10사단의 공격을 받았지만 포병과 항공화력의 지원 아래 이를 격퇴했다. 우측의 제5기병연대는 수중교(수중에 설치한 다리)를 이용해 건너온 북한군 제3사단 병력과 작오산 일대에서 공방전을 전개하고 있었다.

대구 전선의 위기가 고조되는 가운데 유엔군사령관 맥아더 장군은 미 극동공군사령관에게 북한군 집결지인 왜관 일대에 융단폭격을 지시했다. 국군 제1사단 정면에 위치한 낙동강 서쪽지역이 표적으로 선정됐다.

경상북도 칠곡군 다부동전적기념관 전경. 지난 1981년 건립된 다부동전적기념관은 1950년 6·25전쟁 당시 치열했던 다부동 전투 격전지 위에 세워져 생생한 역사 교훈의 현장이 되고 있다.
경상북도 칠곡군 다부동전적기념관 전경. 지난 1981년 건립된 다부동전적기념관은 1950년 6·25전쟁 당시 치열했던 다부동 전투 격전지 위에 세워져 생생한 역사 교훈의 현장이 되고 있다.

미 극동공군사령부는 8월 16일 비29(B-29) 폭격기 98대를 출격시켜 960톤의 폭탄을 표적지역에 투하, 북한군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그러나 대구를 점령하려는 북한군의 공격은 멈추지 않았다. 북한군은 20일, 제13사단을 투입해 가산의 사단사령부까지 기습했으나 국군 역시 예비대를 출동시켜 이를 격퇴하는 등 일진일퇴의 공방이 치열하게 계속됐다.

21일 1대대가 북한군에게 448고지를 빼앗기자 미 제27연대의 측방이 노출됐고, 미 제27연대장 마이캘리스 대령은 백선엽 장군에게 즉각적인 지원을 요청했다. 백선엽 장군은 장병들에게 정신교육을 끝내고 곧바로 부대를 진두지휘해 30분 만에 448고지를 다시 탈환했다.

위험을 무릅쓰고 진두지휘를 감행한 사단장 백선엽 장군을 비롯해 1사단 장병들은 3분의 1 밖에 안되는 전투력 열세에서도 어떻게든 방어선을 지켜내야 한다는 투혼을 불태웠다. “사단장인 내가 선두에 설 테니 내가 만약에 후퇴하면 너희가 나를 쏴 죽여라”라는 백선엽 장군의 회고대로 제1사단은 결사항전의 의지로 끝내 방어선을 사수했다.

한편 22일에는 북한군 제13사단 포병연대장(정봉욱 중좌)이 작전지도를 가지고 귀순해 그가 제공한 정보를 바탕으로 위장된 북한군 포진지를 항공폭격 및 포병사격으로 격멸시킬 수 있었다. 이어 23일 가산 지역에 침투한 북한군 1개 연대 규모가 570고지를 공격하자 제8사단 제10연대가 이를 격퇴하고 추격해 신주막선까지 진출했다.

8월 하순에 이르자 누적되는 피해를 못 견딘 북한군은 결국 대구 공격을 포기하고 물러섰다. 다부동 전투는 이로써 최대 위기를 종식시킨 최대전과를 올린 전투로 기록될 수 있었다.

최초의 실질적인 한미연합작전

다부동 전투는 6·25전쟁 개전 이후 한미간의 실질적인 연합작전이 최초로 이뤄진 전투이다. 다부동 전투는 북한군의 주공격 방향이었던 대구 북쪽 다부동·왜관지역에서 전차로 증강된 북한군의 공격을 국군과 미군이 연합작전을 실시해 물리치고 인천상륙작전에 따른 낙동강방어선에서의 총반격작전 기틀을 마련한 작전이었다.

다부동이 위기에 빠졌을 때 미 제8군사령관 워커 중장은 다부동을 방어하던 국군 제1사단 지역에 국군 1개 연대와 미군 2개 연대를 증원해 한미연합작전을 수행케 했다. 또 미 공군의 융단폭격을 포함한 수많은 항공지원 역시 다부동 전투를 승리로 이끈 주요인이었다. 특히 인근의 주민들도 지게를 메고 나와 포화를 무릅쓰고 탄약, 식량, 물과 보급품을 고지까지 운반하면서 전투를 도왔다. 이렇듯 민·관·군이 혼연일체가 되어 저항함으로써 다부동 지역에 투입됐던 북한군은 커다란 타격을 입고 뒤로 물러설 수 밖에 없었다.

다부동 전투는 민·관·군을 비롯해 우방국 미군이 가세한 총력전이자 한미연합작전이 최초로 일궈낸 쾌거였다. 국군 제1사단과 미 제1기병사단은 낙동강 전선 최대의 격전지로 알려진 대구의 관문인 다부동을 지켜내 6·25전쟁 최대의 위기를 극복하고 대한민국을 풍전등화의 위기에서 구했다.

박종상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

호국의 철옹성, 백선엽 장군의 분전

다부동 전투 당시 국군 제1사단을 지휘했던 백선엽 준장이 신성모 국방부 장관에게 전황을 보고하고 있다.
다부동 전투 당시 국군 제1사단을 지휘했던 백선엽 준장이 신성모 국방부 장관에게 전황을 보고하고 있다.

다부동 전선의 국군이 절대적 전력 열세 상황에서도 끝내 다부동을 사수할 수 있었던 것은 사단장 신분으로 돌격 선봉을 자처한 백선엽 장군의 분전이 있었기 때문이다.

낙동강 전선에서 전략적으로 가장 중요한 다부동 전선을 방어한 것은 백선엽 장군의 국군 1사단이었다. 북한군은 다부동에만 3개 사단, 화포 670여 문, 전차 20여 대를 동원해 파상공세를 펼쳤다. 이를 방어하는 백선엽 장군이 지휘하는 병력은 국군 1사단과 학도병 500명, 172문의 화포가 전부였다. 중과부적의 상황, 그러나 전선을 사수하겠다는 국군의 의지만큼은 북한군을 압도했다.

8월 20일 미 27연대가 국군이 후퇴 중이라며 퇴로 확보를 위해 자신들도 철수하겠다고 통보하자 백선엽 장군은 직접 현장으로 달려가 후퇴하는 병력을 수습, 권총을 들고 선봉에 서서 적진으로 돌격해 488고지 재탈환에 성공했다. 세계전사에서 유례가 없는 사단장의 고지 돌격이었다.

백선엽 장군의 1사단이 다부동을 철옹성처럼 지켜낸 덕분에 낙동강 전선에서 막대한 병력과 물자를 소모한 북한군은 공세 여력을 급격히 상실했고 국군과 미군은 낙동강 전선 전체를 지켜낼 수 있었다.

백선엽 장군은 이후 최초 평양 입성, 서울 재탈환 작전, 중공군 춘계 공세 저지 등으로 승승장구하며 국군 최초로 4성 장군에 올랐다. 육군참모총장, 합참의장 등을 거치며 국군 현대화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2020년 7월 10일, 6·25전쟁 당시 입었던 군복을 수의로 입고 영면에 든 백선엽 장군은 6·25전쟁영웅으로 우리 곁에 남아 있다.

국가보훈처는 낙동강 방어선의 주요 거점마다 상징 시설물을 설치하는 ‘호국벨트화’ 사업의 일환으로 백선엽 장군의 3주기를 맞는 오는 7월 다부동 전적기념관 내에 백선엽 장군 동상을 건립하고 제막식을 가질 예정이다. 총 5억원에 달하는 사업비는 보훈처와 경상북도 지원, 국민 성금 등으로 마련할 예정이다.

야간 전차전 ‘볼링앨리 전투’의 공헌

다부동 전투 중에는 ‘볼링앨리(Bowling Ally) 전투’라는 다소 생소한 이름의 전투가 있다.

전차의 포탄이 어둠을 뚫고 도로를 따라 쏜살같이 날아가는 모양이 마치 볼링공이 핀을 향하여 빠르게 미끄러져 나가는 모양과 같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1950년 8월 21일 밤, 다부동의 천평계곡으로 전차와 자주포를 앞세운 북한군이 몰려왔다. 마이켈리스 대령이 지휘하는 미군 제27연대는 엠26(M26) 퍼싱전차를 배치해 북한의 티34(T34)전차에 맞섰다. 6·25전쟁이 발발한 이래 최초의 야간 전차 대 전차의 사격전이 벌어진 것이다.

다부동 접근로의 좁은 골짜기에는 쌍방의 전차포에서 발사된 철갑탄의 탄환이 5시간 동안이나 불꽃을 튀기면서 밤하늘을 수놓았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미군 장병들은 전차 포탄이 어둠을 뚫고 좁은 계곡의 도로를 따라 상대방의 전차를 파괴하기 위해 곧장 날아가는 모양이 마치 볼링공이 핀을 향하여 재빠르게 미끄러져 나가는 모양과 같다고 해 이날 밤의 전차전에 ‘볼링앨리 전투’라는 이름을 붙였다.

다음날 22일 날이 밝은 다음 미군 정찰대는 파괴된 적 전차 9대와 자주포 4문 그리고 여러 대의 차량과 1,300여 구의 시체를 확인하고 11명을 포로로 생포했다.

이에 따라 대구를 목표로 다부동을 공격하던 북한군은 75%의 병력을 잃고 패주했고, 인근한 국군 제1사단 제12연대 역시 8차례의 공격 끝에 유학산 탈환에 성공, 다부동 전투 승리의 ‘결정적 장면’이 됐다.

1950년 8월 21일 밤, 다부동 천평계곡에서 벌어진 6·25전쟁 최초의 야간전차전인 볼링앨리 전투는 전쟁의 흐름을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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