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의 배경과 전개 과정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국제적인 냉전이 고조되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1948년 남과 북에 각기 분단 정부가 세워지고, 1950년 북한이 무력 남침을 감행함으로써 한반도는 순식간에 전쟁터로 변했다. 냉전 속의 열전이었다. 6·25전쟁은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기습 남침으로 시작되어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성립되기까지 3년간 계속되었다.

(1) 6·25전쟁의 배경

1948년 남과 북에 분단 정부가 수립된 후 미군과 소련군이 모두 철수했다. 이후 38선 인근에서 남북 간에 크고 작은 군사적 충돌이 잦아지기 시작했다. 한반도의 작은 전쟁이라 불리는 이른바 ‘38선 분쟁’이 이어지면서 한반도에 군사적 긴장감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 38선 분쟁

1948년 말과 1949년 초 소련군과 미군이 철수함에 따라 1949년 5월부터 충돌 양상이 대규모로 확대되었다. 38선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한 충돌이 이어지면서 1950년까지도 소규모 충돌과 포격전은 거의 매일 일상적으로 발생했다.

- 애치슨 선언

1950년 1월 미 국무장관 애치슨이 미국의 극동 방위선을 발표했다. 이는 이른바 ‘애치슨 라인’으로, 미국이 공산권을 막기 위해 설정한 방위선을 알류샨 열도에서 일본 류큐 제도를 거쳐 필리핀을 잇는 선으로 설정하였다. 한국과 대만은 제외되어 있었다. 이는 한반도 유사시 미국의 불개입 의도로 읽혀져 북한의 오판을 불러왔다.

- 북한의 전쟁 준비

1949년 10월 중국 공산당의 마오쩌둥이 국·공내전에서 승리하여 중국을 공산화했다. 이때 미국이 개입을 포기하자 김일성은 남침해도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낙관했다. 전쟁 준비 과정에서 김일성 등 북한 지도부는 소련의 스탈린, 중국의 마오쩌둥과 긴밀하게 협의했고 장비와 인력 지원은 물론 전쟁 개시 동의까지 받아 냈다.

(2) 6·25전쟁의 전개 과정

6·25전쟁의 군사적 전개과정은 전황에 따라 다음 네 시기로 나눌 수 있다.

- 북한군 남침기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전쟁이 시작된 때로부터 9월 중순까지의 시기이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은 기습적으로 38선을 넘어 남침을 감행했다. 그로부터 3일 만에 서울이 함락되고 국군은 낙동강까지 밀렸다. 전쟁이 발발하자 유엔의 결의에 따라 북한의 침략을 저지하기 위해 유엔군이 참전했다.

- 유엔군 반격, 북진기

유엔은 전쟁이 시작되자 바로 북한의 행위를 침략으로 규정하고, 유엔 안전보장 이사회 결의 83호를 통해 유엔군을 파견하였다. 유엔군이 반격을 시도한 이 시기는 1950년 9월 중순부터 11월까지로,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의 인천 상륙 작전 성공으로 전세가 뒤집혔다.

국군과 유엔군은 서울을 90일 만에 수복하고, 38도선을 넘어 북한 지역으로 진격했다. 10월 19일 평양을 탈환한 데 이어 10월 23일에는 청천강선에 도달했으며 압록강 초산까지 진격했다. 통일이 눈앞에 보이는 듯했다.

- 중국군 개입, 재반격기

1950년 11월부터 1951년 6월까지의 시기이다. 중국군의 개입과 더불어 단행된 공산군의 공세로 유엔군과 국군은 평택-삼척선까지 후퇴한 후 재반격으로 38도선을 다시 회복하였다. 국군과 유엔군이 후퇴함에 따라 1951년 1·4 후퇴 당시 약 120만 명의 서울 시민이 피난을 떠났다. 군사 작전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체계적으로 피난민 소개 작전을 전개했다.

- 전선 교착, 휴전 협상기

1951년 6월부터 1953년 7월 27일 정전 협정 체결까지의 시기로, 판문점에서 유엔군과 공산군 간에 휴전 회담이 진행되는 한편, 38선 부근에서는 2년여에 걸쳐 고지 쟁탈전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1951년 7월 10일 첫 휴전 회담이 개성에서 열렸다. 3개월 후 판문점으로 장소를 옮겨 회담을 이어 갔고,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정전 협정이 체결되었다.

6·25전쟁 3대 전투

다부동 전투와 인천 상륙 작전, 장진호 전투는 6·25전쟁의 전황을 뒤집을 만큼 중요한 전투이다.

(1) 다부동 전투

6·25전쟁 발발 3일 만에 서울이 함락되고 정부는 대전과 대구를 거쳐 부산까지 이동했다. 이에 낙동강 전선에서 국군과 유엔군이 강렬하게 저항하면서 전선은 교착 상태에 빠졌고 치열한 전투가 수차례 이어졌다.

1950년 8월 3일 유엔군은 마산-왜관-영덕을 잇는 낙동강 방어선을 쳤다. 낙동강 방어선은 적을 저지하기 위해 지형적으로 방어가 유리한 낙동강을 따라 240킬로미터에 걸쳐 연결된 최후의 방어선이었다.

다부동은 대구 북방 22킬로미터 지점의 전술적 요충지이다. 국군과 유엔군은 이 일대를 주저항선으로 설정하고 치열한 전투 끝에 적을 물리쳤다.

국군 제1사단은 유학산-다부동-가산선에서 북한군 3개 사단의 집요한 공격을 끝까지 막아 냄으로써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미 제8군의 적절한 예비대 투입도 다부동 방어 전투의 승리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 전투에서 북한군의 공세를 막아 냄으로써 국군이 낙동강 전선을 지킬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치열한 전투 결과 아군 1만여 명, 북한군 1만 7,500명의 사상자가 나왔다. 6·25전쟁 최대의 격전지이자 최후의 저지선이었던 다부동 전투 승리는 인천 상륙 작전과 이어진 반격의 발판이 되었다.

(2) 인천 상륙 작전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는 낙동강 전선에서 위기를 타개하고 북한군의 배후를 강타하기 위해 인천 상륙 작전을 감행했다. 작전명은 ‘크로마이트(CHROMITE)’였다. 작전 목표는 인천항 확보, 해안 교두보 점령, 김포 비행장 확보, 한강 도하 및 서울 탈환, 서울 근교의 진지 점령 등이었다.

맥아더는 전략적, 정치적, 심리적 이유로 수도 서울을 단시일 내에 탈환하기 위해서는 인천에 상륙해야 한다고 결단했고, 미 합동참모본부는 8월 28일 이 작전 계획을 승인했다. 이 계획에 따라 상륙 부대로 미 제10군단을 창설하여 예하에 미 제1해병대 사단과 미 제7사단, 국군 해병연대, 국군 제17연대 등 총병력 7만 5,000여 명을 편성했다. 해군 함정은 261척이 투입되었다.

1950년 9월 15일 새벽, 마침내 상륙 작전이 시작되었고, 제1단계 월미도 점령을 위해 미 해군이 함포 사격을 가하는 동안 미 해병연대가 상륙에 성공했다. 한국군과 미 해병대는 105고지 정상을 탈환하고 월미도 소탕 작전을 전개했다. 그날 오후 2단계 작전으로 후보 부대들이 인천 해안 교두보를 확보하여 인천 시가지 작전을 전개했다.

1950년 9월 16일부터 미 해병대 제1사단은 한강으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9월 18일부터는 후속 부대인 미 제7사단과 한국 해병대가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한 후 소탕전을 전개했다. 9월 28일 마침내 수도 서울이 90일 만에 수복되었다.

1950년 9월 27일 새벽, 해병 제2대대 제6중대 1소대장 박정모 대령은 서울 탈환 작전으로 중앙청 내의 적을 제압하고 태극기를 게양했다.

(3) 장진호 전투

6·25전쟁 초기인 1950년 11월 미 제10군단 예하 미 제1해병사단을 중심으로 함경남도 장진호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이다. 미 제1해병사단 등 유엔군이 장진호 북쪽으로 진격하던 중 중국군 제9병단 예하 7개 사단 12만 명과 혈전을 벌였다. 1950년 11월 27일부터 12월 11일까지 2주간 전개된 전투에서 방한 장비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한 미군은 영하 40도의 추위로 동상자가 속출했다. 6·25전쟁의 가장 치열하고 결정적인 전투의 하나이며, 현대의 세계 3대 동계 전투로 평가된다.

인천 상륙 작전의 성공으로 불리한 전세를 뒤집은 유엔군은 한반도 북쪽으로 진격했다. 맥아더 사령관은 확실한 승기를 잡기 위해 선제 공격을 가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미 제10군단이 국경선을 진격하기 시작했고, 미 제1해병사단은 당시 북한의 임시 수도였던 강계를 공격하기 위해 개마고원의 장진호 일대까지 진격했다. 이때 중국군은 유엔군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12만 명에 달하는 병력을 장진호 일대에 편성하였고, 유엔군은 그 안에 고립되었다.

유엔군이 장진호 계곡에서 포위되자 모든 부대에는 함흥·흥남으로 철수 명령이 내려졌다. 함경남도 장진군 유담리에 있던 유엔군은 미 공군의 지원으로 중국군의 포위망을 뚫을 수 있었고, 12월 4일 하갈우리에 도착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철수 과정에서 수많은 장병이 죽거나 다치는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철수 중에 발생한 600여 명의 부상자를 들것에 태우고 부대 전체를 유지하면서 질서 있는 철수를 계속했다.

장진호 남쪽 끝에 위치한 하갈우리는 산악으로 둘러싸인 분지형 지형으로 사단 사령부와 보급 시설이 위치한 중추적인 지역이었다. 당시 하갈우리 일대에는 1만여 명의 병력과 1,500여 명의 피난민, 1,000여 대의 차량이 집결해 있었다.

4,300여 명의 부상자는 항공기로 후송하고 나머지 병력은 항공 철수가 아닌 정상적인 철수를 시작했다. 민간인 1,500여 명도 함께 철수했다. 영하 32도를 넘나드는 혹한 속에서 12월 11일 함흥을 거쳐 흥남에 도착함으로써 기나긴 철수 작전의 막이 내렸다.

미 해병사단이 11월 27일 유담리에서 철수를 개시한 이래 12월 11일까지 총 17일이 걸렸다. 이 기간에 393명이 전사하고, 2,152명이 부상 당했으며, 76명이 실종되어 총손실은 2,612명에 달했다. 중국군 9병단은 12개 사단을 투입해 미 해병사단의 철수를 포위하고 차단하였으나 결국 막지 못했다. 중국군 9병단은 막대한 인원 손실을 입고 궤멸되어 함흥 일대에서 4개월 동안의 부대 정비를 거쳐야 했다.

장진호 전투는 수많은 피난민들의 생명을 보호하고, 국군과 유엔군의 전투력을 보존하는 데 기여한 영광스러운 후퇴 작전으로 평가된다.

주제열기 : 전쟁, 위기의 극복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기습 남침으로 전쟁이 일어났다. 개전 초기 큰 위기를 맞았지만, 국군을 비롯한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함께 싸워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전쟁은 유엔군의 참전, 중국군의 개입으로 국제전으로 비화되었다. 일진일퇴의 공방전 속에 양측은 휴전을 모색하였고, 2년여의 협상 끝에 정전 협정이 체결되면서 전쟁이 끝났다.

자료읽기 : 6·25전쟁에서 나라를 지킨 사람들

6·25전쟁에는 군인들만이 아니라 다양한 계층이 참여하여 나라를 지키기 위해 헌신했다. 특히 영화 <포화 속으로>의 배경이 된 포항여중 전투에는 71명의 학도병이 참전하여 48명이 전사하고 23명이 부상을 입고 포로가 되거나 실종되었다. 6·25전쟁에서 나라를 지키기 위해 헌신하신 분들을 추모하고, 그들의 호국 정신을 되새겨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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