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열린 춘천지구전투전승행사.
2016년 열린 춘천지구전투전승행사.
2016년 열린 춘천지구전투전승행사.
2016년 열린 춘천지구전투전승행사.

우리 전생사의 주요 페이지를 차지하는 춘천 전투는 6·25전쟁 개전 초기, 파죽지세로 내려오던 북한의 고속기동부대를 저지해 북한군의 초기 작전계획을 좌절시키고, 국군이 전열을 재정비해 한강방어선을 형성할 시간을 확보한 역사적 전투로 기록된다. 병력과 장비의 절대적 열세를 극복하고 전쟁의 흐름을 바꾼 춘천 전투의 전개 과정과 그 의미를 짚어본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38도선을 따라 배치돼 있던 북한군의 야포들이 남쪽을 향해 일제히 사격을 시작하면서 북한군의 전면 남침이 시작됐다. 소련으로부터 지원받은 티34(T-34) 전차 등 중장비를 앞세운 북한군 기동부대는 옹진반도로부터 개성, 전곡, 포천, 춘천, 양양에 이르는 38도선 전역에서 공격을 개시했다.

국군은 열세한 병력과 장비에도 불구하고 결사적으로 방어전을 전개했으나, 개전 3일 후인 6월 28일에는 수도 서울이 함락되고 대부분의 부대들이 화포와 차량 등 중장비를 잃고 병력만 수습한 채 한강 이남으로 후퇴하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절체절명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북한군은 결국 국군을 완전히 섬멸하지는 못했다. 이는 서울 공격과 함께 동측방으로부터 우회공격을 병행해 국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양면에서 포위 섬멸하려 했던 북한군의 초기 작전계획이 실패로 돌아갔기 때문이었다. 이를 가능하게 한 것은 국군 제6사단이 중동부 전선에서 수행한 춘천 전투 결과 덕분이었다.

개전 직전의 상황과 북한군의 전투계획

6·25전쟁 개전 당시 중동부 지역의 방어를 담당했던 부대는 김종오 대령이 지휘하는 국군 제6사단이었다. 제6사단은 사단사령부를 원주에 두었으며, 예하의 제7연대와 제2연대를 각각 춘천과 홍천 방면에 배치하고 있었다. 또한 사단의 예비부대로는 제19연대가 원주에 주둔하고 있었다. 반면 북한군은 중동부 지역에서 정면의 국군 병력을 격파하고 고속기동부대를 수원 이남으로 우회시켜 국군의 퇴로 및 병력증원을 차단한다는 작전계획을 수립했으며, 이를 위해 1개 군단(북한군 제2군단)을 투입했다.

이에 따라 춘천과 홍천 방면 공격을 위해 투입된 북한군 병력은 3개 사단과 1개 연대 등 총 3만 7,000 명에 달했다. 반면 국군 제6사단의 병력은 9천여 명에 불과해 북한군이 국군에 비해 4배 가까이 우세한 상황이었다. 또한 북한군 제2군단은 122밀리미터 곡사포 24문을 비롯한 각종 포 523문을 보유해 화력과 장비 측면에서도 국군 제6사단에 비해 압도적인 우위를 지니고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북한군은 춘천을 점령한 후 서울 동남쪽으로 진출한다는 작전계획에 따라 제2사단을 화천-춘천 축선에 투입해 공격을 개시했다. 이에 대해 춘천 방면 방어를 담당하고 있던 국군 제6사단 제7연대는 북한군의 주공이 집중될 것으로 예상되는 화천-춘천 방면에 1개 대대(7연대 1대대), 조공 축선으로 예상되는 양구-춘천 방면에 1개 대대(7연대 2대대), 그리고 화천-가평 간 접근로에 2개 중대를 각각 배치했다.

국군 제6사단의 분전

개전 첫날인 6월 25일, 북한군 제2사단 제6연대는 에스유76(SU-76) 자주대전차포를 앞세우고 국군의 38도선 경계진지를 돌파한 후 춘천을 점령하기 위해 남하했다. 정오 무렵, 남하한 북한군의 주력은 춘천 북방의 옥산포 부근에 도달했으며 이들이 넓은 개활지에 노출된 것을 본 국군 제7연대 1대대는 보병과 포병의 협동으로 일제사격을 가한 후 역습을 실시했다. 북한군은 개활지에 노출된 채로 정면공격을 반복하여 큰 피해를 입었으며, 결국 개전 첫날 소양강을 건너 춘천을 점령하려던 북한군의 계획은 실패했다.

이튿날인 6월 26일에는 원주에 주둔하고 있던 국군 제19연대가 춘천으로 증원됐다. 이로써 이 지역은 국군 제6사단 주력이 담당하게 됐으며, 제6사단은 소양강변 일대에 예비진지를 편성하고 방어 전투를 수행했다. 그러나 전날 많은 피해를 입었던 북한군 또한 병력을 보강한 후 26일 새벽에 공격을 재개했다.

북한군은 소양강 방어선 일대를 돌파하기 위해 다수의 화포와 에스유(SU-76) 대전차자주포를 조준사격이 가능한 위치에 배치해 국군의 진지 및 지휘소를 강타했으며, 오전 10시부터 소양강 남안의 봉의산 및 소양교 일대에 주공을 투입해 총공격을 감행했다. 이때 북한군 자주포 3대가 소양교를 통해 남안의 아군 대전차포 진지를 향해 공격해오자, 제7연대 대전차포중대 제2소대장(심일 중위)은 진지로 뛰어들어 직접 사격을 통해 이를 격파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19연대 1대대와 2대대는 소양강변에 부대를 배치한 후, 종일 역습과 철수를 반복하면서 북한군의 남하를 저지했다. 사단 예하의 제16포병대대 제1포대와 제2포대 또한 새벽부터 하루 종일 보병을 엄호하기 위해 집중사격을 가하면서 북한군에 지속적인 피해를 입혔다.

6월 27일이 되자 북한군 제2사단은 재차 총공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북한군은 막대한 인명손실에도 불구하고 공격을 계속했으며, 오전 10시가 되자 소양강 일대의 최후저항선 진지가 돌파됐다. 또한 소양강 입구까지 진출한 북한군 자주포는 다리를 건너 강 남안의 일각을 점령했다.

제6사단은 소양강변에서 전개된 공방전에서 북한군에 상당한 타격을 입혔다. 그러나 초기의 선전에도 불구하고 중과부적의 상황을 극복할 수는 없었으며, 다른 전선과의 균형도 고려해야 했다. 결국 제6사단은 철수를 결정하고 지연전을 실시하기 위해 춘천 외곽에 방어선을 편성했으며, 북한군 제2사단은 당초 계획보다 이틀이나 지연된 6월 27일 18시 무렵에야 춘천을 점령했다.

춘천 전투를 위한 전투준비와 노력들

당시 상황을 보면 개전 초기 국군의 병력과 장비는 북한군에 비해 크게 열세한 상황이었으며, 1개 사단이 보유한 전투력에 비해 과도하게 넓은 지역을 담당해 방어를 위한 부담도 과중한 형편이었다. 그렇다면 제6사단은 이처럼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어떻게 춘천 전투와 같은 눈부신 성과를 거둘 수 있었는가?

이는 철저한 전투 준비 때문이었다. 제6사단은 춘천이 38도선에 인접해 있음을 감안해 북한군의 접근이 예상되는 주요지역의 진지보강에 주력했다. 특히 제7연대는 방어에 유리한 소양강변 일대에 예비진지를 구축하는 등 방어태세를 충실히 했다. 또한 제6사단은 북한군의 공격징후를 포착하기 위해 사단 자체의 정찰대를 운용하고 북한군 귀순병으로부터 정보를 획득하는 등, 적극적인 첩보수집을 실시했다. 이를 바탕으로 제6사단과 예하 부대의 지휘관들은 개전 전부터 경계태세를 강화했다.

병력들의 교육훈련 수준이 높다는 것도 제6사단의 장점이었다. 당시 육군본부는 1950년 6월 말까지 대대급 훈련을 완료하도록 각 사단에 지시했으나, 일부만이 훈련을 마쳤을 뿐 나머지 부대들은 중대훈련조차도 목표에 미치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나 제6사단, 특히 제7연대는 연대장 임부택 중령이 장병들의 교육훈련에 각별한 관심을 갖고, 대대전투훈련을 완료했다. 또한 대부분의 장교들을 보병 및 포병학교에 파견해 자질향상에 주력하는 등 심혈을 기울였다.

한편 춘천 전투의 성과는 비단 군만이 아닌 지역주민들의 적극적 지원에 힘입은 것이기도 했다. 개전 전에 이뤄진 진지보강은 재정지원이 부족하던 상황에서 지역 내 학생과 주민들의 도움으로 이뤄진 것이었다. 개전 당일에는 국군의 탄약고가 북한군의 포화에 노출되는 위기가 발생하자, 춘천사범학교 학도호국단을 포함한 인근 주민들이 포탄운반에 동참해 탄약 전량을 안전지대로 운반해낸 일도 있었다. 또한 춘천 제사공장의 여공들은 주먹밥을 지어 군인들에게 분배하면서 사기를 북돋워 주었다.

6·25전쟁에서 춘천 전투가 갖는 의미

춘천 전투는 6·25전쟁 초기의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성공적으로 방어에 임한 의미있는 전투였다. 비록 춘천 자체의 함락을 막진 못했지만, 그럼에도 제6사단이 치른 3일간의 분전은 헛된 것이 아니었다. 제6사단은 전투 기간 중 6,790여 명의 북한군을 사살하거나 부상을 입혔으며 120여 명을 포로로 잡았다. 또한 북한군의 에스유76(SU-76) 자주포 18문, 장갑차 2대, 대전차포 2문 등 다수의 장비를 파괴하는 전과를 거뒀다.

이러한 전과보다도 춘천 전투가 6·25전쟁에 미친 가장 큰 영향은 바로 북한군의 초기 작전계획을 좌절시킨 것이었다. 중동부 지역을 담당한 북한군 제2군단은 당초 서울의 우회 포위와 국군 주력의 퇴로 차단이라는 목표를 지니고 있었다. 이를 위해 이들은 개전 당일 춘천을 점령하고 2일차에는 고속기동부대를 투입해 신속히 수원을 점령하도록 계획돼 있었다.

그러나 국군 제6사단이 3일 동안 춘천 일대에서 북한군의 공격을 지연시킴에 따라 조기에 서울 동남측으로 우회해 국군을 양면 포위하려던 북한군의 계획은 큰 차질을 빚게 됐다. 이를 통해 국군은 한강 이북에 집중 투입된 주력부대의 전열을 재정비해 한강방어선을 형성할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를 얻을 수 있었다.

전쟁사를 돌이켜 보면, 패배가 목전에 임박한 절망적인 상황에서 작은 사건이 전쟁 전체의 향방을 바꾸는 사례가 드물지 않다. 춘천 전투는 대한민국의 운명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달해 있던 6·25전쟁 초기에 북한군의 작전계획을 좌절시켜 전쟁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전투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전윤재 군사편찬연구소 전쟁사부 선임연구원

소양1교·평화공원, 당시 전투 기억-춘천 전투 현장

6·25전쟁 당시의 치열했던 총탄 상흔이 남은 소양1교.
6·25전쟁 당시의 치열했던 총탄 상흔이 남은 소양1교.
평화공원의 기념조각들.
평화공원의 기념조각들.

6·25전쟁 발발 후 국군이 거둔 첫 승전 기록인 ‘춘천 전투'의 현장. 격전지는 70여 년 전의 포화를 잊은 듯 조용하기만 하다.

춘천 ‘소양1교’, 소양강 남북을 잇는 이 다리는 70여 년 전 전투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교각에 남은 총탄 자국은 당시의 치열했던 공방과 그 총탄을 뚫고 최초의 승전보를 기록했던 국군의 의지를 상징하는 듯하다.

춘천 전투는 6·25전쟁 초기 국군 제6사단이 춘천 소양강과 봉의산 일대에서 사흘간 치른 방어전투. 이 전투로 북한군이 전쟁 초기 서울 함락을 노렸던 ‘3일 작전’은 수포로 돌아가고, 국군은 반격과 전략적 후퇴를 주도적으로 정리하는 소중한 시간을 벌었다.

당시 참전했던 용사들은 “북한군은 개전 당일 춘천까지 점령하라는 명령 수행을 위해 밀물같이 소양강으로 달려왔지만 우리군의 포격으로 우두 벌판과 소양강변은 북한군 시체로 뒤덮일 정도였다. 결국 우리는 이 전투에서 이겼다”고 증언한다. 당시 소양강 방어선을 지키기 위해서 민·관·군의 희생이 매우 컸다. 지역 주민들은 사흘 밤낮으로 주먹밥을 만들고 시민과 학생은 포탄을 나르는 등 하나가 되어 싸웠다.

소양1교에서 1.5킬로미터 남짓 떨어진 근화동에는 오래된 교각과 함께 그날의 치열했던 전투를 기억하는 ‘춘천대첩기념평화공원’이 조성돼 있다.

공원은 1975년 춘천시 소양로1가에 당시 전투와 승전, 희생자를 기리기 위해 ‘자유수호의 탑’을 세웠으나 소양2교 확장에 따라 춘전전투 50주년을 맞아 현재의 장소에 ‘춘천대첩기념평화공원’으로 새롭게 단장하고 재개장했다.

공원은 평화롭게 흐르는 소양강을 배경으로 잊지 말아야 할 아픈 역사 그리고 오늘의 대한민국을 지켜낸 승전의 역사를 증언하는 듯 평화로운 분위기가 흐른다. 소양강의 경관을 즐기기 위한 시민들이 자유롭게 드나들며 휴식을 취하기도 하고 기념탑 등을 둘러보기도 한다.

공원 진입로의 ‘평화공원’ 이름을 새긴 석물을 지나 높이 세워진 무공탑이 눈에 보인다. 주위에는 당시의 용감한 전투 장면을 재연한 조각들이 줄지어 서 있다. 공원 안에는 ‘육이오참전학도병기념탑’, ‘충용의 터전’ 석탑, ‘월남전참전기념탑’도 함께 세워져 ‘튼튼한 나라’를 위한 희생과 헌신을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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