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을 바쳐 나라를 지킨 사람

(1) 경찰

6·25전쟁 중 경찰은 군인과 함께 전투를 치르거나 각자 근무하던 지역에서 북한군과 싸웠다. 당시 전쟁에 참여한 경찰력은 6만 3,000여 명으로 그중 1만여 명이 사망하고 6,900여 명이 부상당했다.

- 내평지서(지구대) 전투

1950년 6월 25일 전쟁 발발 당일 춘천의 내평지서에서 근무하던 노종해 지서장과 대한 청년단원 3명 등 12명이 압도적 화력과 병력으로 공격을 퍼붓는 북한군과 1시간 이상 교전하며 북한군의 남하를 지연시켰다. 노종해 지서장을 비롯한 경찰관과 청년단원 9명이 전사했다. 이들의 희생으로 국군 6사단은 춘천 남쪽에 저지선을 구축할 수 있었다.

- ‘곡성 부대’ 유격전

1950년 7월 북한군이 호남 지역까지 밀고 내려오자 상부에서는 퇴각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한정일 곡성서장은 “주민들을 버리고 철수할 수 없다”라며 경찰관 등 520여 명을 모아 ‘곡성 부대’를 만들어 곡성군 태안사를 중심으로 유격전을 벌였다. 특히 7월 29일 압록교 전투에서 북한군 3개 중대를 상대로 치열한 전투 끝에 52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2) 교사

김재옥 교사는 1950년 충주 동락초등학교 교사로 부임한 지 5일 만에 6·25전쟁이 일어났다. 하지만 김재옥 교사는 아이들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겠다며 학교에 남았다. 이 무렵 충주 방면으로 남하하던 북한군은 7월 6일 동락초등학교에 이르러 무기와 탱크를 학교 교정에 집결해 놓았다. 김재옥 교사는 북한군에게 “국군은 이미 철수했다”라는 말을 전해 안심시키고 혼자 틈을 타 학교에서 4km나 떨어져 있는 국군의 매복지를 직접 찾아가 적의 동태를 상세히 알렸다.

당시 국군은 300여 명이었고, 학교를 점령한 북한군은 2,000여 명으로 7배에 가까운 전력 차이가 있었지만 기습 공격이 주효했다. 여기에 철수했던 국군 6사단 7연대 3대대가 돌아와 북한군을 포위하고 협공을 벌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정부는 김재옥 교사의 공로를 인정해 2012년 10월 1일 국군의 날에 보국 훈장을 추서하고 그의 공훈을 기렸다. 현재 동락초등학교 교정에는 김재옥 교사를 기리기 위해 건립된 김재옥교사기념관, 김재옥교사현충탑, 6·25참전기념비 등이 있다. 인근에 6·25전쟁에서 국군이 거둔 첫 승리인 동락 전투를 기념하기 위해 건립한 동락전승비가 있다.

(3) 학생

6·25전쟁 당시 국내외에서 학생들이 펜 대신 총검을 잡고 참전하여 7천여 명이 산화하였다. 5만여 명의 학도의용군, 재일 유학생 642명이 전투에 참가하였고, 20여 만 명의 학생들이 후방 선무 및 공작, 위문 활동, 게릴라 소탕 작전 등을 펼쳤다.

- 학도의용군전승기념관

경북 포항시 북구 용흥동에 있는 학도의용군전승기념관은 포항여중(현 포항여고) 전투에 참여하였다가 생존한 학도의용군이 주축이 되어 2001년 건립하였다. 6·25전쟁 당시 낙동강 최후 방어선인 포항에서 육군 제3사단 소속 학도의용군 71명이 단독으로 전투에 참가해 47명이 목숨을 잃었다.

- 헌7학병6·25참전기념비

헌7학병6·25참전기념비는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초읍동 어린이대공원 안에 있다. 1950년 8월 부산의 고등학교 및 대학교 재학생 중 1,661명이 육군 헌병학교에 제7기로 지원 입대하였다. 한 달 남짓의 짧은 훈련을 받은 후 전국의 격전지에 배치되었으나 전투 경험 부족으로 많은 학생들이 전사했다. 헌7학병은 6·25전쟁 동안 전사 115명, 순직 11명, 실종 9명, 행방불명 48명으로, 183명이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4) 소년병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발간한 『6·25 전쟁 소년병 연구』에 따르면 6·25전쟁 기간 중 병역 의무가 없는 18세 미만 청소년인 ‘소년병’은 총 2만 9,604명에 이른다.

이 가운데 확인된 전사자는 2,573명이다. 14~17세의 나이에 입대한 소년병은 학도병과 달리 정규군에 배속되었다. 경찰과 전방 사단, 후방 사단, 미군, 해병대 등에 배속되어 다부동 전투 등 낙동강 방어선 전투에 대거 투입되었고, 희생자도 많았다.

정부는 2010년까지 소년병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18세 미만의 청소년을 징집했다는 사실이 국제법 위반으로 비칠 소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1) 6·25전쟁 유엔군 참전

6·25전쟁은 북한의 불법적인 남침 전쟁이자 ‘국제 전쟁’이었다. 북한과 중국, 소련의 공산 3국의 침략에 대응하여 유엔은 유엔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에 따라 약 3년간의 전쟁 동안 16개 국가에서 전투 부대를 파병하였고, 6개국에서는 의료 지원단을 제공했다. 물자 지원국 38개국을 포함하면 60개국이 6·25전쟁 당시 한국을 도왔다. 6·25전쟁에는 약 195만 명의 유엔군이 참전해 전사자는 3만 7,902명, 부상자는 10만 3,460명, 포로 및 실종자는 9,767명이었다.

- 유엔 결의안과 참전 결정

1950년 6월 25일 전쟁 발발 당일 유엔안전보장이사회는 북한군의 침략 중지 및 38선 이북으로의 철수를 요구하는 6·25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틀 후인 6월 27일에는 북한군의 침략을 격퇴하기 위해 한국에 모든 지원을 제공할 것을 결정한 2차 결의안을 채택했다.

유엔에서 두 차례의 결의안이 통과됨으로써 미국과 다른 회원국들은 한국에 군대를 파견하고, 한국에 필요한 원조를 제공할 수 있었다.

- 유엔군 창설과 유엔기 사용

1950년 7월 7일 유엔 안보리는 유엔 회원국 군대를 통합 지휘하게 될 유엔군을 창설하고, 유엔군 총사령관에 맥아더 장군을 임명했다. 유엔 창설 이후 처음으로 유엔기를 앞세우고 유엔 21개국이 참전했다는 사실은 ‘집단 안전 보장 원칙’이라는 유엔의 기본 정신에 입각한 사상 최초의 집단행동이라는 점에서 중대한 역사적 가치를 지닌다.

(2) 휴전 회담 : 협상과 전투

- 개성에서 회담이 시작되다

1951년 7월 10일 개성 내봉장에서 휴전 회담이 시작되었다. 전투를 중지하고 전쟁 재발을 막기 위한 의제를 두고 협상을 벌였다. 양측은 최종 합의에 도달할 때까지 군사 작전을 계속한다는 원칙 아래 협상을 진행하였다. 이에 따라 회담이 시작된 이래 협상과 군사 작전은 밀접하게 관련되어 진행되었다. 그 결과 휴전 회담장에서는 설전(舌戰)이, 전선에서는 혈전(血戰)이 전개되었다.

- 판문점 회담

개성 회담장이 불안정하다는 이유로 1951년 10월 25일 회담 장소가 판문점으로 이전하여 진행되었다. 휴전 회담장이 있었던 판문점은 전후에도 남북 분단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 군사 분계선 협상

양측은 첫 번째로 군사 분계선 문제에 관해 논의하였다. 1951년 11월 27일 현재의 접촉선(대치선)을 잠정적인 군사 분계선으로 확정하는 데 합의하였다. 한 달 내에 다른 의제가 합의되면 휴전이 성사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포로 문제와 다른 의제로 다투는 중에 한 달 기한이 넘어갔고, 그 후로 전쟁과 회담은 무려 2년 이상 이어졌다. 그 과정에서 협상을 유리하게 하고자 군사 작전을 펼침으로써 전쟁의 피해와 희생은 더 커졌다.

- 전쟁 속의 또 다른 전쟁터, 거제도포로수용소

휴전 회담에서 가장 난항을 겪은 것이 포로 협상이었다. 유엔군은 포로의 의사를 존중하는 자유 송환 원칙을 주장한 데 비해, 공산국 측은 무조건 본국 송환을 주장했다.

포로들의 송환 여부를 확인하는 심사 과정에서 송환 거부 포로(반공 포로) 송환 희망 포로(친공 포로) 간에 처절한 혈투가 벌어졌다. 거제도포로수용소는 또 다른 전쟁터였다.

- 거제도포로수용소유적공원

거제도포로수용소유적공원 상설 전시관에는 포로의 수용 배치 상황, 생활상, 폭동 현장 등이 재현되어 있다. 포로들이 송환 심사를 거부하며 폭동을 일으키고, 심지어 포로수용소장을 납치하는 사건도 벌어졌다.

(3) 정전 협정 체결

- 1953년 7월 27일 정전 협정 체결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판문점에서 정전 협정이 체결되었다. 그로부터 12시간 후인 오후 10시 정전 협정이 발효되면서 전투가 중단되었다. 판문점 조인식에서는 휴전 회담 수석 대표가 서명하고, 후방의 문산과 평양에서 양측 군사령관이 정전 협정문에 서명했다.

- 정전 협정(Armistice Agreement)

정전 협정문은 본문 5개 조 및 63개 항으로 구성되며, 군사 분계선과 비무장 지대(DMZ) 설정, 군사정전위원회 및 중립국감시위원회 설치, 포로 교환, 고위급 정치 회담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 군사 분계선 위에 놓인 판문점

휴전 회담이 진행되었던 판문점 인근에 현재의 군사정전위원회가 열리는 판문점이 있다. 군사정전위원회 회의실은 군사 분계선 위에 놓여 있으며, 유엔군과 북한군이 공동으로 경비하는 ‘공동 경비 구역(JSA)’ 안에 있다. 판문점은 남북한 대결과 긴장의 장소이지만, 남북 접촉과 회담, 남북 교류의 지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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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병 이우근의 부치지 못한 편지

어머니, 전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것도 돌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10여 명은 될 것입니다. 나는 4명의 특공대원과 함께 수류탄이라는 무서운 폭발 무기를 던져 일순간에 죽이고 말았습니다.

수류탄의 폭음은 나의 고막을 찢어 버렸습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귓속에는 무서운 굉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괴뢰군의 다리가 떨어져 나가고, 팔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너무나 가혹한 죽음이었습니다. 아무리 적이지만 그들도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더욱이 같은 언어와 같은 피를 나눈 동족이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하고 무겁습니다.

어머니, 전쟁은 왜 해야 하나요? 이 복잡하고 괴로운 심정을 어머님께 알려 드려야 내 마음이 가라앉을 것 같습니다. 저는 무서운 생각이 듭니다. 지금 내 옆에서는 수 많은 학우들이 죽음을 기다리는 듯 적이 덤벼들 것을 기다리며 뜨거운 햇빛 아래 엎드려 있습니다. 적은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 언제 다시 덤벼들지 모릅니다. 적병은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는 겨우 71명입니다. 이제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하면 무섭습니다.

어머니, 어서 전쟁이 끝나고 어머니 품에 안기고 싶습니다. 어제 저는 내복을 손수 빨아 입었습니다. 물 내 나는 청결한 내복을 입으면서 저는 두 가지 생각을 했습니다. 어머님이 빨아 주시던 백옥 같은 내복과 내가 빨아 입은 내복을 말입니다. 그런데 저는 청결한 내복을 갈아입으며 왜 수의를 생각해 냈는지 모릅니다. 죽은 사람에게 갈아입히는 수의 말입니다.

어머니 어쩌면 제가 오늘 죽을지도 모릅니다. 저 많은 적들이 그냥 물러갈 것 같지는 않으니까 말입니다. 어머니, 죽음이 무서운 게 아니라 어머님도 형제들도 못 만난다고 생각하니 무서워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살아 가겠습니다. 꼭 살아서 가겠습니다. 어머니, 이제 겨우 마음이 안정이 되는군요. 어머니, 저는 꼭 살아서 다시 어머님 곁으로 가겠습니다. 상추쌈이 먹고 싶습니다. 찬 옹달샘에서 이가 시리도록 차가운 냉수를 한없이 들이켜고 싶습니다.

아! 놈들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다시 또 쓰겠습니다. 어머니 안녕! 안녕! 아 안녕은 아닙니다. 다시 쓸 테니까요. 그럼 이만 …….

위 글은 1950년 8월 포항 전투에서 숨진 서울 동성중학교 3학년인 이우근의 일기이다. 이우근은 국군 제3사단 소년병으로 포항여중 앞 벌판에서 전사했다. 이 일기는 그의 주머니 속에서 발견됐다. 이 전투를 앞두고 16살의 이우근 학생이 느꼈을 심정을 생각해 보고 평화의 소중함을 되새겨 보자.

주제열기 :유엔군 참전의 날

7월 27일은 6·25전쟁 정전 협정 및 ‘유엔군 참전의 날’이다. 6·25전쟁 유엔 참전국과 유엔참전용사의 공헌을 기억하고 감사를 전하기 위해 1953년 정전 협정이 체결된 날을 법정 기념일로 제정하여 제60주년을 맞은 2013년부터 매년 국가보훈처 주관으로 기념하고 있다. 유엔참전용사의 희생과 헌신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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