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38선을 넘어 북진했던 유엔군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다시 서울을 내주고 말았다. 재정비를 마친 유엔군은 반격에 나서 한강 남안에서 대관령까지 전선을 회복했으나 중공군이 대병력을 중동부 전선에 투입하면서 교통과 병참의 요충지인 지평리에서 일대 격전이 벌어졌다. 유엔군은 1개 연대에 불과한 병력으로 중공군 4개 사단의 인해전술 공격을 격퇴했고 이 전투의 승리로 아군은 38선 회복의 결정적 계기를 마련했다.

지평리 전투 현장으로 미 제23연대 전차가 진입하고 있다.
지평리 전투 현장으로 미 제23연대 전차가 진입하고 있다.
지평의병·지평리전투기념관 내부 사진. 당시 양측 병력과 무기 현황 등을 알 수 있다.
지평의병·지평리전투기념관 내부 사진. 당시 양측 병력과 무기 현황 등을 알 수 있다.

지평리 전투는 1951년 2월 중공군 제4차 공세 시 미 제2사단 23연대가 프랑스 대대, 국군1유격중대와 함께 경기도 양평군 지평리에서 열 배가 넘는 중공군 4개 사단의 집중 공격을 격퇴한 성공적인 방어전투이다.

유엔군은 1951년 1월 중공군의 제3차 공세로 평택~삼척 선까지 후퇴했다. 이에 미 제8군 사령관 리지웨이 장군은 축차방어선을 설정하고 ‘이 선은 후퇴가 아닌 반격으로 전환해 적을 섬멸하기 위한 선’임을 강조하며 반격작전을 개시했다.

그 결과 서부지역은 한강 남안을 대부분 점령했고, 동부전선은 홍천과 대관령 일대까지 진격했다. 국군과 유엔군의 강력한 반격을 받은 중공군은 중동부 전선의 중심인 횡성과 양평 일대에 4개 군단을 배치하고 대대적인 공세를 펼쳤다.

1951년 2월 11일 17시, 중공군 제4차 공세인 ‘2월 공세’가 시작됐다.

횡성·안흥·평창 등지에서 전진하던 아군은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많은 피해를 받아 후퇴했고, 적의 공세는 교통의 요지인 지평리에서 그 정점에 이르렀다.

교통과 병참 요충지, 지평리를 사이에 둔 경쟁

경기도 양평군 지평면의 중심지이며, 강원도와 인접한 지평리는 도로 교차점이자 철도 중앙선이 지나는 교통과 병참의 요충지로서 유엔군이나 중공군 모두에게 작전의 주요 목표였다. 특히 유엔군 입장에서 지평리는 인접 지역의 도로망을 통제하고 한강선 진출의 관문 역할을 하던 곳이었다. 아군 입장에서는 전략적 측면에서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요지였다.

횡성 일대를 점령한 중공군은 전략적 요충지인 지평리 점령을 위해 4개 사단 5만 명 규모의 대병력을 동원했다. 중공군은 지평리를 여러 겹으로 포위해 외부와의 연결을 완전히 차단하고 13일부터 대대적인 공세에 나섰다.

미 제23연대, 중공군 4개 사단에 맞서

횡성 전선에서 밀려온 미 제10군단은 지평리 제23연대의 철수를 고려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그러나 미8군 사령관 리지웨이 장군의 판단은 달랐다. 오히려 지평리를 잘 선정된 거점으로 본 리지웨이 장군은 이곳에 중공군을 최대한 끌어들인 다음 유엔군의 막강한 화력으로 격멸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지평리가 중공군의 공세를 차단하고 전세를 역전시킬 결정적인 장소로 부각되는 순간이었다.

프리만 대령이 지휘하는 미 제23연대는 미군 제2보병사단 23연대와 23연대에 배속된 프랑스 대대를 주축으로 국군1유격중대, 미군 37포병대대, 82방공포대대 B포대, 503포병대대 B포대, 전차부대 등이 속한 5,600명 규모의 부대였다. 프리만 대령은 가용 자원을 모두 동원해 지평리 방어를 철저히 준비했다. 적의 공격로에 지뢰지대를 설치하고 1.6킬로미터 길이의 원형 방어진지 외부에는 철조망을 둘렀다. 북쪽에 1대대, 동쪽에 3대대, 남쪽에 2대대, 서쪽에 프랑스 대대를 배치하고 논두렁 등 주변의 지형지물을 최대한 이용해 참호를 만들었다. 또한 전차는 최일선에, 포대는 후방에 배치하고 예비대를 준비하는 등 방어를 위한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아군의 전략을 인지하지 못한 중공군은 2월 13일 저녁부터 2개 사단을 동원해 8차례에 걸쳐 파상 공격을 가해왔다. 미 제23연대는 전 화력을 집중해 진지 주변에 빈틈없는 탄막을 구성해 적의 공격을 격퇴했으나, 적의 집중 포격이 연대 지휘부에 떨어지면서 연대 군수참모가 전사하고 연대장 프리만 대령이 다리에 박격포탄 파편을 맞는 등의 큰 피해를 입었다.

프랑스 대대 총검 돌격하며 진지 사수

중공군은 2개 연대를 추가로 투입해 14일 새벽까지 공격을 계속했고, 이로 인해 동 틀 무렵에는 미 제23연대의 인명 손실이 100여 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지평리를 반드시 사수하겠다는 아군의 의지는 조금도 꺽이지 않았다. 제10군단장은 부상을 입은 제23연대장 프리만 대령의 교체를 지시했으나, 프리만 대령은 “내가 부하를 이끌고 여기에 왔으니, 내가 반드시 이들을 데리고 나갈 것”이라며 후송을 거부하고, 신임 연대장의 자문 역할로 계속 전투현장에 머물렀다.

이날 리지웨이 미8군 사령관이 직접 헬기편으로 제23연대를 찾아와 격전을 치르고 있는 연대원들을 격려하고, 항공기를 이용해 물자를 공급하는 등 지평리 방어를 위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드디어 14일 밤, 지평리 전투의 최대 격전이 벌어졌다. 저녁 8시 30분부터 중공군의 전면 공격이 시작됐고, 특히 남쪽의 제2대대 정면에 공격이 집중됐다. 제2대대는 백병전을 벌이면서까지 막아내려 했지만, 2대대와 프랑스 대대의 틈으로 공격해오는 중공군을 막지 못해 15일 새벽 3시 경에 진지를 상실했다. 아군의 최대 위기였다. 전체 방어선이 붕괴될 수 있는 극도로 위급한 상황이었다.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아군은 예비로 남겨둔 2개 소대를 투입했고 제2대대는 새벽 5시 경에 200미터 후방에 급편 방어진지를 만들어 중공군의 침입을 결사적으로 막아냈다. 다른 대대들은 격전 속에서도 잇따라 진지 방어에 성공했다. 특히 몽클라르 중령이 지휘하는 프랑스 대대는 탄약이 떨어지자 머리에 붉은 띠를 매고 총검 돌격을 불사하며 진지를 사수해 제23연대는 최대 위기를 극복했다.

크롬베츠 특임대 적진 돌파해 아군 연결

지평리에서 제23연대가 격전을 벌이고 있는 동안 지평리 남서쪽의 미 제9군단 예하의 제5기병 연대가 제23연대와 연결하기 위해 작전을 준비했다. 제5기병연대는 15일 아침부터 제23연대와 연결하기 위한 작전을 개시했으나 적의 거센 저항으로 정오가 지나도록 큰 진전을 보지 못했다. 상황이 여의치 않자 제5기병연대를 지휘하던 크롬베츠 대령은 곡수리에서 지평리까지 6킬로미터 구간을 뚫기 위해 보전 합동 작전을 세웠다. 연대 전체에서 모은 23대의 전차에 중대 병력을 탑승시켜 적진을 돌파하는 대담한 작전이었다. 이를 위해 크롬베츠 특수임무부대를 편성하고 크롬베츠 대령 자신이 위험을 무릅쓰고 5번째 전차에 탑승해 적진 돌파에 나섰다.

적의 거센 저항을 받은 크롬베츠 특수임무부대는 보병부대원들의 적잖은 희생과 전차도 일부 잃었지만 작전개시 1시간여 만에 6킬로미터에 이르는 적진을 돌파해 이날 오후 17시 15분 경 지평리 남쪽에서 제23연대 전차와 연결하는데 성공했다.

크롬베츠 특수임무부대의 작전 성공으로 남쪽 망미산에 배치된 중공군은 사기가 저하돼 철수를 결정했다. 이어 16일 새벽에는 지평리를 포위한 중공군이 전면적으로 퇴각하기 시작했다. 미 23연대는 이 틈을 놓치지 않고 중공군을 추격했고, 악천후임에도 불구하고 미군·프랑스군·한국군은 후퇴하는 중공군을 추격하며 전과를 확대했다.

지평리 전투 승리로 재반격 기틀 마련

지평리 전투는 유엔군이 중공군의 대규모 공세에 맞서 진지를 끝까지 사수하고 승리를 거둔 최초의 전투였다. 무엇보다 지평리 전투의 승리로 중공군의 제2·3차 공세로 저하된 유엔군과 국군의 사기는 단숨에 회복됐다.

지평리 전투의 승리에는 부상 투혼을 발휘한 연대장 프리만 대령과 프랑스군 대대장으로 참전한 몽클라르 장군의 뛰어난 리더십, 그리고 혼연일체가 되어 적과 싸운 미군·프랑스군·한국군 장병들의 활약이 컸다. 이 전투에서 열 배 이상의 적을 상대한 미 제23연대전투단은 중공군에게 대략 5,000여 명의 손실을 입혔다. 반면 미 제23연대전투단의 손실은 전사 52명, 부상 259명, 실종 42명에 그쳤다. 값진 희생을 치른 끝에 거둔 승리였다.

지평리 전투의 승리로 국군을 비롯한 유엔군은 전세를 만회하고, 재반격의 기틀을 다졌을 뿐만 아니라 전략적 주도권을 되찾아 38도선 회복의 반격작전 수행을 위한 일대 전환점을 마련했다.

김기섭 군사편찬연구소 전쟁사 부장

백전 노장 몽클라르 중령, 지평리를 사수하다

프랑스 대대를 지휘한 몽클라르 장군.

지평리를 사수한 미23연대에는 몽클라르 중령이 지휘하는 프랑스 대대가 배속돼 있었다. 몽클라르 장군은 1·2차 세계대전에 모두 참전해 혁혁한 전과를 세운 백전 노장이었으나 대대는 중령이 지휘한다는 프랑스의 군법에 따라 6·25전쟁 발발 후 스스로 계급을 중령으로 낮춰 지휘를 맡았다.

13일 저녁 중공군이 인해전술로 진지까지 몰려오자 몽클라르 장군 이하 모든 장병들은 철모를 벗고 붉은 수건으로 머리를 동여매고 총검을 휘두르며 중공군에 맞섰다.

수동식 싸이렌을 울려 중공군의 신호 수단인 나팔과 호각소리를 차단해 중공군은 더욱 혼란에 빠질 수 밖에 없었다. 수많은 전투를 경험했던 백전노장 몽클라르의 기지가 빛을 발한 것이다.

다음 날인 14일 밤에도 중공군이 몰려오자 프랑스군은 지근거리인 20미터까지 기다렸다가 일제 사격으로 공격한 후 다시 백병전을 펼쳐 중공군을 물리쳤다.

피해를 입은 중공군은 다음 날 새벽 수많은 시체를 남기고 철수했다. 이 전투의 승리로 중공군 개입 이후 고전하던 유엔군은 잃어버렸던 자신감을 되찾았다.

국가보훈부 박민식 장관은 지난해 11월 몽클라르 장군의 탄생 130주년과 유엔참전용사 국제추모의 날(11월 11일)을 맞아 한국을 찾은 몽클라르 장군의 아들 롤랑 몽클라르 씨에게 별 4개가 새겨진 조선시대 장수 지휘봉(등채)을 증정한 바 있다.

몽클라르 지휘소, 양조장 건물 그대로

현장 - 지평리의 오늘

지평리 전투 당시 몽클라르 장군이 지휘소로 사용한 지평양조장.
지평리 전투 당시 몽클라르 장군이 지휘소로 사용한 지평양조장.
지평리전투기념관 옆에 지평리 전투유엔군(프랑스) 참전충혼비와 지평리 전투유엔군(미국) 전승충혼비가 서 있다.
지평리전투기념관 옆에 지평리 전투유엔군(프랑스) 참전충혼비와 지평리 전투유엔군(미국) 전승충혼비가 서 있다.

따가운 오월의 햇살이 내리쬐는 지평리 들판에 전쟁의 상흔은 남아있지 않았다.

1950년 그 치열했던 중공군과의 전투로 시신과 피 냄새로 가득찼던 현장은 기념탑과 기념관, 몇몇의 기념물을 제외하고는 이곳이 격전장이었다고 상상키 어려운 모습이었다.

지평리, 한국전쟁 대표적 전투의 현장이지만 이젠 신록이 우거진 숲과 평화로운 주민들의 삶터로 바뀐 지 오래다.

시내 한복판을 지키고 선 지평양조장. 이곳은 당시 프랑스 몽클라르 장군이 양조장 건물을 빌려 지휘소로 썼던 곳으로, 최근까지 유명한 브랜드 양조장으로 ‘본연의 역할’을 하고 있었으나 현재는 제조시설 문을 닫은 채 덩그러니 건물만 남았다.

2층 건물의 위층 지휘소 자리는 아직도 유리 창문을 밖으로 낸 모습 그대로였고, 금방이라도 장군의 육성이 들려올 것만 같았다. 유엔군 지휘소였기에 치열한 전투 후에도 살아남은 유일한 건물이다.

화강암 조형물 하나였던 전적비는 이후 세워진 미국군 참전 충혼비와 프랑스군 참전 충혼비를 나란히 앞세워 정비됐다. 바로 옆에는 새로 지어진 ‘지평의병·지평리전투기념관’과 이웃으로 선 채 영령들의 유훈을 기리고 있다.

지평리전투기념관은 의병기념관과 병합해 세움으로써 국권 수호를 위해 헌신한 항일의 역사를 함께 기념하고 있다. 기념관은 6·25전쟁의 역사와 지평리 전투의 전개과정과 함께 지역 참전 국가유공자의 군번줄과 신분증 등 개인사물도 전시해 눈길을 끌고 있다.

70년의 세월이 흘러도 전쟁의 흐름을 바꿨던 전투는 이제 지평리 곳곳의 기념물에 뚜렸이 새겨진 채 역사의 순간으로 흘러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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