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7월 27일 열린 ‘6·25전쟁 유엔군 참전의 날’ 기념식에서 미8군 군악대, 리틀엔젤스, 국방부 군악대대 등 전 출연진이 ‘같이 갑시다(We Go Together)’를 합창하고 있다.

전쟁은 비극이었고, 참화였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그 전쟁을 딛고 일어서 오늘의 자랑스러운 선진 대한민국을 일궈냈다. 전쟁이 멈춘 지 70년, 포화는 멈췄지만 긴장은 쉴 새 없이 이어졌다. 우리는 때로는 대결로, 때로는 대화로 한반도의 위기를 기회로 바꾸어 놀라운 대한민국의 역사를 써왔다. 정전70주년 슬로건 ‘위대한 헌신으로 이룬 놀라운 70년’이 그 내용을 압축해서 표현하고 있다. 우리 신문은 이번호부터 국방부 군사편찬위원회와 공동기획으로 ‘튼튼한 안보, 평화와 미래를 위한 전진’을 싣는다.

논어 위정편의 “칠십이종심소욕불유구(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라는 구절은 공자의 인생관을 보여주는 핵심 내용 중의 하나이다. 해석하자면 “70세에는 내 마음이 내키는 대로 행동하여도 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정도가 될 것이다.

인생이 이렇다면 70년이 되어가는 한반도 정전체제는 어떤 상황일까. 모두들 아는 대로 군사질서를 규율하는 국제규범으로서의 기능은 유지하고 있지만, 북한의 끊임없는 정전협정 위반행위와 무력화를 위한 도발은 멈추지 않고 지속되고 있는 상황이다.

정전협정은 정치회담을 통해 전쟁을 법적으로 완전히 종결하기 전에 군사적 차원에서 일시적으로 적대행위를 중지시키는 임시적인 성격의 협정이다. 이러한 정전체제가 유지될 수 있도록 뒷받침하는 실질적인 세력균형을 잡아주는 것이 한미동맹이었다. 올해는 정전체제와 함께 한미동맹이 70년을 맞이한 뜻깊은 해이기도 하다.

한미동맹은 군사안보동맹을 넘어 이제는 글로벌 포괄적 전략동맹으로 발전하고 있으며, 한반도에서 전쟁을 억제하는 안보의 가장 큰 버팀목일 뿐만 아니라 자유민주주의의 발전과 경제성장의 핵심적인 발판이 됐다.

이에 힘입어 대한민국은 6·25전쟁 직후 1인당 국민소득이 67달러로 세계에서 가장 빈곤했던 국가였지만, 2021년 기준 3만5,000달러를 넘어서며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당당한 세계 강국이 됐다. 70년 전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이 조약으로 우리 후손들이 누대에 걸쳐 갖가지 혜택을 누릴 것”이라고 한 예언대로 정전협정 이후 대한민국은 한미동맹이라는 튼튼한 기반 위에서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6·25전쟁, 참혹한 민족적 비극

많은 역사학자들은 인류의 역사를 전쟁의 역사라고 말한다. 인류사에서 전쟁이 차지한 비중이 그만큼 크다는 것이다. 인류문명은 실제로 무력, 경제력, 철학과 사상을 중심으로 발전해 왔으며, 이 중에서 무력의 비중은 결코 작지 않았다.

이 흐름에서 우리 민족이 겪은, 1950년 6월 시작된 동족상잔의 비극을 살펴볼 수 있다. 우리는 세계대전에 버금가는 자유민주주의와 사회주의 양대 진영이 힘을 겨룬 전쟁을 이 땅 위에서 경험했다. 북한의 김일성과 소련의 스탈린, 중국의 마오쩌둥이 모의해 시작된 6·25전쟁은 20세기 들어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제외하면 가장 참혹한 전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채 북한의 도발과 핵미사일 등으로 우리의 평화와 번영을 위협하는 가장 큰 상수로 자리 잡고 있다. 이 전쟁은 잊혀진 전쟁이 아니라 아직도 진행형인 전쟁인 것이다.

6·25전쟁이 남긴 상흔

남북·참전국 인명 재산 피해 막심

1950년 6월 25일부터 약 3년 1개월 동안 진행된 6·25전쟁은 깊은 상흔을 남겼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발간한 ‘한권으로 읽는 6·25전쟁’ 자료에 따르면 전쟁으로 인한 인명피해는 ‘300만 명 이상’으로, 당시 남북한 전체 인구인 약 3,000만 명의 10% 해당하는 인원으로 집계됐다. 국방부와 통계청의 공식자료는 남한지역에서는 군인 약 62만2,000명(전사·사망 13만7,899명, 부상 45만 742명, 실종 2만 4,495명, 포로 8,343명), 경찰 약 1만7,400명, 민간인 약 99만1,000명 등 총 162만여 명의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북한지역의 인명피해는 정확하게 공개된 바는 없으나 군사정전위원회 자료에 따르면 북한군은 약 64만 명(전사·사망 및 부상 52만 명, 실종 12만 명)의 인명피해가 발생했으며, 북한 민간인 피해는 1954년 북한 중앙통계국 자료로 107만8,000명 수준인 것으로 나타난다. 이를 종합하면 북한지역에서도 최소한 약 171만8,000명의 인명피해가 발생할 수 있다.

이와 함께 유엔군으로 참전한 22개국(전투부대 파병 16개국, 의료지원 6개국)의 인명피해도 전사·사망 3만7,902명, 부상 10만3,460명, 실종 3,950명 등 14만 5,312명에 이르렀다.

중국 등 공산군 측의 인명피해는 중공군의 인명피해가 전투손실로 인한 사망 11만6,000여 명, 부상 22만여 명, 실종 2만9,000여 명 등 총 36만5,000여 명이며, 비전투손실로 인한 사망은 2만5,000여 명으로 집계되고 있다. 이를 종합하면 중공군의 인명피해는 총 39만여 명에 이르는 것으로 확인된다(중국 정부 공식 발표). 그런데 이 수치에는 한국과 미국 측에서 추정하는 비전투손실 부상자 약 60만 명이 누락되어 있다. 이를 포함할 경우 중공군의 인명피해는 약 100만 명으로 추산할 수 있다. 여기에 소련군의 인명피해 전투손실 사망 294명, 비전투손실 사망 21명, 총 315명은 별도이다.

한편 전쟁은 323만 명의 피난민을 만들어 냈으며, 1952년 3월 15일까지 발생한 전재민(戰災民)의 수는 1,000만 명을 넘어섰다. 1953년 7월 정전협정이 체결될 때까지의 전재민의 수는 훨씬 늘어났겠지만 정확한 통계수치가 없으나 확인된 수치만으로도 전체 인구의 1/2 이상이 전쟁의 직접적인 피해자가 된 것이다.

이와 함께 전쟁은 개인 가옥과 재산은 물론 국가 기간 산업시설과 공공시설을 모두 파괴했다. 이로 인한 남한의 물적 피해는 총 4,100억 환으로 집계됐다. 이는 1953년 당시의 시장 환율(미 1달러당 한화 180환)을 적용할 경우 22억 달러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1953년도 우리나라의 국민소득이 3,570억 환임을 고려하면 전쟁으로 인한 물적 피해가 얼마나 심각했던가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정전, 전쟁을 넘어서기 위한 노력

원조국에서 OECD 국가로

6·25전쟁은 인적 물적 피해와 함께 남북한 간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이질화라는 더욱 큰 상처를 남겼다.

그러나 전쟁의 아픔 속에서도 우리 국민들의 생존을 위한 정신력은 더욱 강인해져 전후 복구와 국토 재건의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여기에 미국을 비롯한 우방국들도 전후 우리 경제를 재건하는데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유엔의 이름으로 대한민국에 대한 구호와 재건지원은 무려 35억 달러에 이르렀다. 여기에 군사원조 액수를 포함하면 훨씬 더 많은 지원이 이뤄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우리 국민의 강인한 정신력과 우방국의 지원은 대한민국이 전쟁의 폐허에서 일어나 경제발전과 자유민주주의의 초석을 다지는 결정적인 힘이 됐다.

한편 정전체제 아래에서 남북한이 걸어온 길은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한국은 경제건설에 주력해 2009년 11월 25일, 드디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개발원조위원회에 가입하는 나라가 됐다. 공식적으로 원조를 받던 국가가 원조선진국으로 탈바꿈하게 된 것으로, 이는 OECD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세워진 신생독립국 가운데 경제발전과 정치적 자유민주주의를 동시에 이룩하여 도움을 받는 나라에서 도움을 주는 유일한 국가가 된 것이다.

반면 북한은 일관되게 무력적화통일 노선을 견지하면서 군비확충과 군사적 도발을 계속해 왔다. 김일성 이후 3대 세습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핵미사일 개발을 현재도 지속하고 있는데, 그것은 북한경제와 국력 발전의 결정적 한계로 작용했다. 여기서 북한의 군사적 도발 및 전쟁을 억제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힘은 한미동맹이었다. 한미동맹을 통해 우리는 북한의 새로운 도발에 대한 억지력을 확보하고 우리 군의 전력 확충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성공한 동맹, 한미동맹의 힘

이승만 대통령은 6·25전쟁 후 대한민국의 안전보장 방안으로 태평양동맹의 결성과 함께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체결을 추진했다. 1953년 8월 7일 이승만 대통령과 덜레스 미 국무장관은 회담 후 공동성명을 통해 “미 합중국과 육군, 해군과 공군을 대한민국의 영토 내와 그 부근에 배치하는 권리를 대한민국은 이를 허여하고 미 합중국은 이를 수락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 필요한 한국의 시설들과 노력들을 이용할 문제는 계속 협의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이어 8일 덜레스 국무장관과 변영태 외무장관은 ‘대한민국과 미 합중국간의 상호방위조약’을 가조인하고, 그 후 같은 해 10월 1일 워싱턴에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정식 서명한 후, 1954년 7월 한미정상회담 거쳐 11월 17일 정식 발효됐다. 이렇게 빛을 본 한미동맹은 오늘날 발전된 대한민국을 건설하는데 절대적인 역할을 했다. 역사는 한미동맹을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동맹으로 평가하고 있다.

지난 70년간 정전체제가 유지된 배경을 살펴보면 정전협정 자체의 구속력도 무시할 수 없지만 힘에 의한 균형이 크게 작용했음을 알 수 있다.

북한의 끊임없는 대남 무력도발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전쟁을 도발하지 못한 것은 한미동맹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서 한미동맹에 의한 힘의 균형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확인하는 한편 ‘힘에 의한 평화 구현’이야말로 향후 정전체제의 미래를 설계하는데 필요한 중요한 교훈임을 알 수 있다.

튼튼한 국방 유지에 국민 의지 모아야

국제사회의 중대한 위협임에도 불구하고 핵무기 개발과 미사일 도발을 멈추지 않는 북한은 여전히 자신들의 일정표에 따른 개발 노력을 지속할 것이고, 우리 군의 대북억제력 강화를 빌미로 도발 강도를 높이면서 대비태세를 시험하여 혼란을 조성할 것이다. 무인기 침투, 사이버 공격, 각종 군사합의 위반 등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정전이 종전이라는 마침표로 이어지지 못한 오늘의 상황은 우리가 여전히 ‘튼튼한 안보’라는 커다란 과제를 안고 미래를 향해 전진해야 하는 숙명임을 일깨워주고 있다.

로마의 전략가 플라비우스 베게티우스 레나투스는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을 준비하라’고 말했다. 지금은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에 대비하여 한미동맹과 함께 우리 스스로 어떠한 도발에도 압도적으로 승리할 수 있는 강력한 대응능력 및 대비 태세를 구축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필요한 시점이다. 따라서 우리는 안보의 핵심축인 한미 군사동맹을 강화하고 양국 간 국방협력의 범위와 수준을 확대 심화 발전시키는 한편 확고한 안보의식을 갖고 튼튼한 국방력을 유지하는데 국민의 의지와 힘을 모아야 할 것이다.

이성춘 군사편찬연구소장, 북한학 박사

 

2년에 걸친 협상, 전쟁을 중단하는 ‘정전협정’ 마무리

6·25전쟁이 치열하게 이뤄지던 1951년 7월 10일, 개전 1년 여를 넘기면서 전쟁 당사자들은 정전협상에 들어갔다. 협상은 2년을 끌어 1953년 7월 27일이 돼서야 마무리될 만큼 길고 지루했다. 그 정전협상의 배경과 과정 등의 이야기를 정리한다.

1. 정전협상 배경

1950년 10월 중공군의 개입에 따라 1951년 초 전쟁은 쌍방 간의 후퇴와 반격의 양상으로 전개됐다. 유엔군이 북진할 때의 기대와는 달리 전쟁은 확전되고 장기전의 양상을 띠게 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엔회원국들은 외교적 협상을 통한 해결을 촉구했고, 미국 내에서도 평화적인 휴전을 요구하는 여론이 고조됐다. 미국 정부는 1951년 3월 22일 참전국들과 협의를 거쳐 휴전 제의방안을 검토했다.

미국 국무부의 지시에 의해 1951년 5월 31일 조지 케넌(George Kennan)이 유엔 주재 소련 대사 야코프 말리크(Jacob Malik)와의 비공식 회동을 가지면서 협상이 시작됐다.

2. 정전협상 진행

1951년 7월 19일 개성 근교 내봉장에서 정전협상 제1차 본회의가 개최됐다.

1951년 7월 26일 제10차 본회담에서 ①의제 채택 ②비무장지대(DMZ)의 설치를 위한 군사분계선(MDL) 합의 ③정전 이행을 위한 군사정전위원회와 사찰·감시기구의 설립 ④전쟁포로에 관한 제반 절차 ⑤외국군대 철수를 다룰 정치회담 등 5개 협상의제에 대해 합의가 이뤄졌다.

1951년 11월 27일 지상의 군사분계선과 비무장지대 문제가 합의되자, 12월 1일 제32차 본회의에서 공산군 측이 북한 후방지역 도서에 주둔하고 있는 유엔군의 철수를 요구함으로써 해상의 군사분계선 문제를 협의하게 됐다.

1952년 4월 28일 제44차 본회의에서부터 1953년 6월 6일 제144차 본회의까지는 전쟁포로의 교환문제를 협의했다. 이 전쟁포로 교환문제는 1년 이상 논쟁이 이어지며 정전협상에서 큰 난제가 됐다.

3. 정전협정 타결

조속한 종전을 원했던 쌍방은 1953년 7월 19일 제158차 본회의에서 정전협정에 대해 최종 타결했다. 결국 유엔군 측과 공산군 측은 총 159회 본회담, 179회 분과위원회 회의, 188회의 참모장교회의, 238회의 연락장교회의 등 총 765회에 달하는 회담을 거쳐 1953년 7월 27일 ‘국제연합군총사령관을 일반으로 하고 조선인민군최고사령관 및 중국인민지원군사령원을 다른 일방으로 하는 한국 군사정전에 관한 협정’을 체결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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