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에서 24세 나이로 호주 최연소 대대장이 돼 전공을 세운 찰스 그린 중령은 종전 후에는 일반인으로 돌아와 부인과 어린 딸의 가장으로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6·25전쟁이 발발하자 새로 창설된 정규 육군 첫 호주 보병대대 지휘관으로 선임돼 다시 전장으로 향했다. 1950년 9월 8일 일본에 도착한 그린 중령은 당시 훈련 수준이 매우 빈약했던 대대를 몇 주 만에 최정예 적군에 맞서 전투를 수행할 수 있는 견실한 전투부대로 바꿔 놓았다. 그가 이끄는 호주 육군 제3대대는 9월 29일 부산에 상륙한 뒤 영연방
1950년 7월 대전에서 창설된 공군정찰비행대는 전선이 남하함에 따라 김천과 의성, 영천기지로 이동해 적정 정찰과 연락 임무를 수행하면서 한국군의 작전을 지원했다. 8월로 접어들며 포항과 영천지구에 대한 북한군의 공세가 더욱 강화됐다. L-4정찰비행부대 조종사로서 제2군단에 파견돼 있던 전구서 이등상사는 정찰작전을 수행하던 중 포항 기계 방면으로 침입하는 적 지상군 2개 대대를 발견하고 유엔공군의 F-51전투기로 유도해 적을 전멸시켰다. 긴박한 전세 속에 전구서 이등상사의 기민한 대응이 이룬 쾌거였다. 9월의 대대적인 적의 포위공격
미국인 선교사 부부의 아들로 평양에서 태어난 윌리엄 해밀턴 쇼는 자신을 한국인이라 생각했고 한국을 조국으로 여겼다. 평양에서 고등학교를 마쳐 유창한 한국어 실력을 갖췄으며 한국인 친구들도 많았다. 미 해군에 입대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노르망디 상륙작전에도 참전했던 쇼 대위는 1947년 전역 후 한국으로 돌아와 미 군정청 소속으로 ‘조선 해양경비대사관학교(현 해군사관학교의 전신)’에서 교관으로 근무하며 생도들을 가르쳤다. 교관 근무 중 학업에 뜻을 품고 미국으로 건너가 하버드에서 철학 박사학위과정을 진행하다가 6·25전쟁이 발발하자
1949년 개성상업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해병 2기생으로 군에 입대했던 고종석 일등병조는 김성은 부대에 배치돼 지리산과 제주도 일대 공비토벌작전에 참가해 공을 세웠다.그는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경남 진동리지역에서 북한군 제6사단 정찰대대를 기습 공격해 침공을 저지함으로써 진동리-마산 간 보급로를 타개하고 낙동강 최후 방어선을 사수하는데 크게 기여했다.8월 16일 낙동강방어선에서 교착상태에 빠진 북한군이 전략요충지인 마산과 진해를 해상에서 봉쇄하기 위해 통영에 침입하자 당시 손원일 해군 중장은 해병대에게 출동명령을 하달했다
1953년 7월 휴전조인을 앞둔 상황에서 중공군은 이른바 ‘7•13공세’라고 불리는 대규모 공세를 펼쳐 왔다. 강원도 김화군 원동면에 위치한 교암산의 금성돌출부를 차지하기 위한 중공군 최후 공세도 그중 하나였다.7월 13일 21시 적은 교암산 전초에 공격을 가했다. 자정 무렵 전초를 우회한 적은 교암산의 주진지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김 대위를 비롯한 중대원은 수류탄전에 이어 육박전을 감행했으나, 중앙이 돌파되는 최대의 위기에 봉착했다. 김 대위는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전 포병의 진내사격을 요청하는 한편 중대원에게 동굴
심일 대위는 1950년 전쟁이 발발하자 대전차포중대 소대장으로서 춘천지구 옥산포 전투에서 자신을 포함한 5명의 특공대를 조직해 화염병과 수류탄을 들고 적의 자주포를 향해 돌진하는 육탄공격을 감행, 북한군 자주포 2대를 격파했다. 이후 1951년 1월 제7사단 수색중대장 임무 수행 중 영월전투에서 적의 총탄에 맞아 28세의 나이로 전사했다. 둘째인 심민은 경찰로 근무하며 6•25전쟁 중 치안 유지를 위해 노력했으나 32세이던 1960년 내무부 치안국 경무과 근무 중 업무 과로에 따른 심장마비로 순직했으며, 셋째인 심익은 서울
미군 제213부대 600여 명의 병력으로 4,000여 명의 중공군을 상대해 치열한 전투를 벌여 진지를 완벽하게 지켜낸 전투가 있었다.1951년 5월 26일 경기 가평군 북면 홍적리에서 펼쳐진 가평전투에서 중공군 350여 명이 사망하고 830여 명이 포로가 되거나 투항한 반면, 미군 제213부대는 단 한 명의 전사자도 발생하지 않아 ‘기적의 전투’라 불리고 있다.미국 남부 유타 주에서 파병된 제213야전포병대대 600명의 부대원은 대부분 젊고, 나이 어린 병사들이었다. 1951년 5월 26일 밤, 그들은 가평으로 가서 방어선을 구축하
1950년 8월 3일부터 9월 2일까지 약 한 달에 걸쳐 계속된 다부동전투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의 파리를 지키기 위해 연합군이 펼쳤던 ‘베르뎅전투’에 비유될 만큼 처절하였을 뿐만 아니라 전략적으로 중요한 전투였다. 전쟁이 발발한 직후부터 개성, 문산, 파평산, 봉일천 일대 방어전과 음성지구전투, 화령장전투, 영강전투 등에서 싸워 온 김점곤 소장의 제12연대가 마침내 다부동에서 수세 일변도의 전세에 반격의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9월 25일부터 본격적인 반격을 시작한 제1사단은 보은-청주-안성을 거쳐 고랑포로 진격했으며, 1
1950년 6•25전쟁이 시작된 후 한 달도 안 돼 남한 대부분이 북한군에 넘어가고 광주, 순천, 광양까지 함락되던 무렵, 전남 곡성경찰서에도 ‘모두 퇴각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당시 곡성경찰서장이던 한정일 경감은 “주민을 버리고 철수할 수는 없다”면서 자발적으로 ‘곡성전투경찰대’를 조직했다. 7월 24일 경찰과 의용대원 중 자원자를 중심으로 전투가 가능한 520명을 인솔해 곡성군 태안사에 입산한 한정일 서장은 전투중대 4개 중대, 유격대 1개 중대, 정찰대 1개 소대 등으로 조직을 편성하고 인근 산악지대에 배치해 즉각적인
6·25전쟁 당시 대표적인 유격대가 바로 황해도 일대에서 활동한 구월산 유격부대이며, 그중에서도 가장 활약이 컸던 대원이 ‘구월산 여장군’ 이정숙 대장이다.이정숙 대장은 6·25전쟁 직전 공산군 손에 부모와 남편을 잃고 본인은 복역하다가 탈출, 1950년 10월 황해도 안악군에서 서하무장대를 조직해 무장대원 70여 명과 농민군을 진두지휘하며 북한군과 싸웠다.이후 서하무장대는 김종벽 대위가 이끄는 구월산 유격부대에 합류했다. 일명 동키 제2부대로도 불린 구월산 유격부대는 1950년 10월 중순, 황해도 은율군 장련면과 이도면 등의 반
김홍일 육군 중장은 1920년 중국 귀주강무학교를 졸업 후 소위로 임관해 1945년 4월에 한국광복군 참모장이 되어 이봉창,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지원하는 등 독립군으로 무장투쟁을 전개했다.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고 시흥지구전투사령관으로 임명된 김홍일 소장은 3일 만에 북한군이 서울까지 진격해 들어오자 후퇴하던 국군을 결집해 3개의 혼성사단을 편성하고 한강 이남 24km에 이르는 방어선을 구축했다.김홍일 소장의 진두지휘 아래 국군은 노량진-영등포 일대와 신사리-말죽거리 일대에서 도하하려는 북한군을 저지했다. 치열했던 한강 방
미국 버지니아주 리치몬드 의대에서 학업을 수행한 후 귀국한 현봉학 박사는 민간인 신분으로 1950년 8월초 미군의 통역관에 임명됐다.그는 미군과의 원활한 의사소통으로 그들의 지원을 이끌어냄으로써 낙동강전선에서 진동리 및 통영전투의 승리에 일조하는 등 전장을 누비며 통역을 맡아 우리군의 승리에 기여했다.또한 전선시찰을 위해 사령부를 방문한 미 제10군단장 알몬드 소장과의 운명적인 만남은 민사부 고문으로 일하면서 흥남철수작전에서 진정한 인류애를 보여 주었다.작전을 책임진 알몬드 소장의 입장에서는 10만여 명에 달하는 미 제10군단 병력
강길영 해병 중위는 1949년 4월 15일 처음 해병대에 자원 입대해 소총병으로 인천상륙작전, 수도 서울 탈환작전 등에 참여해 수많은 전공을 세웠다.이후 해병간부후보생 제3기로 종합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받고 1951년 소위로 임관, 가리산 및 화천지구전투에 참가해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그는 1951년 9월 1일에 해병 제1연대 3대대 11중대 선임장교로 강원도 양구 전방의 펀치볼 확보를 위한 전술적 요새인 924고지 전투에 참가해 중대의 선두에서 돌격전을 감행하던 중 적탄에 의해 전사했다.924고지의 공격 과정에서 제11중대는 전진을
1952년 10월 정전협정을 앞두고 철원평야 일대 중부전선의 전략 요충지 백마고지는 6일부터 열흘 동안 무려 7번이나 고지의 주인이 바뀌는 치열한 혈전이 벌어지고 있었다.백마고지는 철원평야와 고대산 및 아군의 주보급로를 위협하는 중요지역으로서, 제9사단은 장마철이 지나고 청명한 날씨가 계속되자 적의 공격을 예상하고 진지를 보강하던 중 적의 집중적인 기습공격으로 395고지를 피탈 당했다.이에 제9사단 제30연대는 즉각 역습을 실시했으나 결사적으로 저항하는 중공군의 수류탄 및 기관총사격으로 아군의 피해가 극심해 돌파구 마련에 급급한 상
노르망디상륙작전과 함께 대표적인 상륙작전으로 손꼽히는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에는 대한민국 해군첩보부대의 헌신적인 활약이 있었다.당시 인천지구에는 북한군 정규 병력이 주둔해 삼엄한 경비가 펼쳐지고 있었던 가운데 해군정보국첩보대는 X-RAY작전에 참여해 인천 앞바다에 위치한 영흥도를 거점으로 인천에 잠입했다.이들은 인천상륙작전에 필요한 정보를 수집하는 것을 주 임무로 인천 해안포대의 위치, 병력배치 상황, 주둔 병력의 규모와 해안방어태세 등을 파악했다.인천상륙작전이 임박해 영흥도 첩보기지에 철수명령이 내려졌으나 북한군 1개 대대가 영흥도로
북한의 6·25남침 이후 3일 만에 서울이 함락되고 대전마저 차례로 적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자 우리군은 8월 1일 낙동강 방어선까지 후퇴하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지게 됐다.낙동강지구전투의 최대 격전지인 다부동 전투, 포항전투, 기계전투, 영천전투 등 낙동강 지구 곳곳에서는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던 대한민국을 구하기 위한 최후의 전투가 연일 벌어졌다.그중에서 기계지역은 포항과 안강에 이르는 도로 상의 요지로서 이를 상실할 경우 동부전선에서 일대 위기를 맞게 되는 요충지였다.강희중 일등중사는 제18연대 1중대 1소대 선임하사로 19
김용배 육군 준장은 1950년 충북 음성의 동락리 전투에서 적 연대를 격파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했으며, 1950년 10월 6일에는 38선을 돌파 후 초산에 돌입해 10월 25일 압록강변에 태극기를 꽂았다. 이로써 김용배 장군 부대는 북쪽 국경선에 가장 먼저 도달한 최선봉부대의 영예를 안았다.1950년 7월 4일 김용배 소령이 속해있는 제7연대는 충주, 장호원 방면으로 남진중인 적 제15사단을 저지하고 장호원을 확보하라는 임무를 받고 이날 밤 제2대대를 선발대로 출발시켰다. 정찰 중 갑자기 나타난 적에게 대원들의 사격이 집중됐고 기습
1950년 6월 25일 북한군 1군단은 서울을 점령하고, 2군단으로 하여금 춘천-홍천-수원으로 내려와 국군의 퇴로를 차단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이 계획에 따라 북한군 1군단은 서울로 진격해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했으며, 2군단은 춘천으로 진격해 26일 오전 춘천을 점령코자 했다.이때 북한군의 춘천진격을 1시간 이상 저지시켜 북한군의 진격을 늦추고 국군 제6사단의 주저항선 구축에 기여해 북한군의 계획을 수포로 만든 전투가 1950년 6월 26일의 내평지서 전투다.당시 화천에서 춘천으로 가는 46번 도로 내평리 마을 한복판에 위치한
1951년 4월 22일 터키 제1여단이 연천 동북방 5km 지점에 위치한 장승천 전투에서 중공군 제60군 예하 제179사단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이는 중공군이 참전한 이후 다섯 번째의 공세로 중공군 참전 이후 최대 병력이 동원된 한반도에서의 마지막 공세이기도 했다.19시경에는 터키 여단이 배치된 대광리 남쪽의 장승천 일대에 40분 동안 전격 준비사격을 했고 이 포격에 포병진지와 통신시설이 피해를 입었다. 적군이 총공격을 시작했을 때, 제9중대 전방 포병관측 장교였던 메흐멧 고넨츠 중위는 무전을 보냈다. “적군은 우리 중대가 주둔
중공군은 지평리 전투에서 패배하고 서울마저 다시 국군이 수복하자 1951년 4월 총 70만이라는 대병력을 한반도에 집결시켜 대공세를 시작했다. 하지만 임진강 전투에서 영국군 글로스터 대대 800여 명은 중공군 3개 주력사단 4만 2,000명을 상대로 사력을 다해 맞섰다. 이 과정에서 중공군의 발이 3일 동안 묶였고 한국군과 유엔군은 안전하게 철수해 수도권 북방에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하고 서울을 사수할 수 있었다. 중공군 3개 사단의 인해전술에 맞서 글로스터 대대원 800명중 41명의 전우만이 살아남은 처절한 전투를 치렀다. 그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