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공군은 지평리 전투에서 패배하고 서울마저 다시 국군이 수복하자 1951년 4월 총 70만이라는 대병력을 한반도에 집결시켜 대공세를 시작했다.

하지만 임진강 전투에서 영국군 글로스터 대대 800여 명은 중공군 3개 주력사단 4만 2,000명을 상대로 사력을 다해 맞섰다. 이 과정에서 중공군의 발이 3일 동안 묶였고 한국군과 유엔군은 안전하게 철수해 수도권 북방에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하고 서울을 사수할 수 있었다.

중공군 3개 사단의 인해전술에 맞서 글로스터 대대원 800명중 41명의 전우만이 살아남은 처절한 전투를 치렀다.

그러나 인해전술을 앞세운 공세로 결국 글로스터 부대는 와해됐다. 이 과정에서 포로로 잡힌 안소니 파라 호커리 대위는 1953년 8월 31일 판문점으로 귀환할 때까지 7번이나 탈출을 시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중공군과 북한군의 끈질긴 세뇌 공작에도 굴복하지 않고 군인으로서의 본분과 명예를 끝까지 지켜냈다.

이 전투는 비록 졌지만 당시 부대원들은 군인으로서 본분을 다해 결과적으로 서울로 신속하게 진격하는 역할을 맡고 있는 중공군 63군 3개 사단이 작전에 차질을 빚게 만들어 중공군의 사기를 크게 떨어뜨리고 중공군 남하작전을 실패하게 만들었다.

안소니 파라 호커리 대위는 휴전협정으로 영국군에 복귀해 북유럽 연합군사령관(대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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