밴 플리트는 6·25전쟁 당시 주한 미8군 사령관을 역임했다. 그는 제1,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혁혁한 전공을 세움으로써 미국 전사에서 전쟁영웅으로 추앙받는 장군이었다. 그는 한국에 도착 직후 ‘승산이 없는 전쟁이니 동경으로 철수해야 한다’는 참모의 건의를 듣고 곧바로 ‘나는 승리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 나와 함께 하기 싫다면 당장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면서 현장의 분위기를 단번에 바꾼 명장이었다. 그의 아들 지미 밴 플리트 2세도 6·25전쟁에 자원해 B-26 폭격기 조종사로 참전했다. 그러나 지미 대위는 1952년 4월 4일
“청하건대, 저희를 보내 주십시오”.1951년 5월 중공군의 1차 춘계공세 당시 용문산은 아군의 서부전선과 중부전선을 연결하는 중요한 지역으로 북으로 향한 진격요선이자 남으로는 방어를 위한 기지로서 작전상 양보할 수 없는 피아간의 쟁탈 초점이었다. 중공군의 계속된 투입으로 분전과 혼전은 종일토록 계속됐지만 아군은 계속 진지에서 물러나질 않았다. 계속된 적군의 공격으로 밀고 밀리는 전투 속에서 353고지가 중공군에게 포위를 당했으며, 치열한 전투로 통신이 끊겨 제3대대는 고립되고 말았다. 이에 제2연대에서는 제3대대와 통신이 두절되자
1952년 1월 중순 6·25전쟁 당시 승호리 철교는 평양 동쪽 10㎞ 지점에 위치해 막대한 군수물자를 만주와 평양을 거쳐 중동부 전선으로 수송하는 적 후방보급로의 핵심 요충지였다. 미 제5공군 합동참모본부는 북한의 후방보급로 차단을 위해 승호리철교 폭격작전을 36회에 걸쳐 계획하고 출격했으나, 실패만을 거듭한 후 대한민국 공군에게 그 임무를 부여했다.당시 대한민국 공군은 1950년 7월 2일 최초로 F-51 전폭기 10대를 미 극동공군으로부터 지원받아 전쟁을 수행하고 있었으며, 1952년 초까지 단지 15대의 전폭기로 작전에 임하
신철수 공군소령은 1926년 일본에서 출생, 항공기에 대한 남다른 동경심으로 산이항공기 기관학교에 입학했으나, 가정 형편상 학교를 졸업하지 못하고 일본군에 징집돼 다치아라이 육군비행학교에서 조종과정을 수료했다.조국의 해방으로 귀국한 신철수 소령은 1949년 항공병 제1기로 육군항공기지사령부에 입대해 조종하사관으로 복무하던 중 6·25전쟁 직전인 1950년 4월 간부후보생 8기 과정에 입교해 공군 소위로 임관했다.신철수 소령은 1951년 10월 공군 제1전투비행단 제10전투비행전대 편대장으로 유엔 공군과 협동작전이 아닌 한국 공군 단
고태문 육군대위는 1951년 8월 24일 제11사단 제9연대 7중대 소대장으로 복무시 펀치볼 동부의 884고지 탈환작전에 참가했다. 고 대위는 1952년 11월 제5사단 27연대 9중대장으로 강원도 고성군에 위치한 351고지를 점령, 방어하던 중 적 2개 중대의 공격을 받았다. 제1차 공격은 다행히 방어했으나 재차 공격해 온 적의 방어에는 실패해 곤경에 처했다.그러나 고태문 대위가 이끄는 중대는 죽고 사는 것조차 생각할 겨를이 없는 피의 살육전 끝에 적에게 큰 피해를 입혀 마침내 적을 격퇴시켰다.이처럼 고태문 대위의 과감한 육탄공격
6·25전쟁 발발 초반에 오산 죽미령에서 미국 스미스 기동대가 북한에 참패한 이후, 24보병사단장 딘 소장은 그 전말을 들은 후에도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딘 소장은 여전히 34보병연대가 평택-안성 축선에 방어선을 설치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으나 그것은 큰 오산이었다. 그의 부대들은 훈련과 장비 부족을 비롯해 전투력이 총체적으로 저하되었음에도 딘 장군은 일선 부대들이 임무수행을 완벽하게 수행하리라고 본 것이다.1950년 7월 7일 34연대 작전장교인 존 던 소령은 딘 소장의 명령에 따라 북진 중인 예하 3대대
차일혁 경무관은 1920년 남한 유일의 발전소인 칠보발전소 탈환과 지리산을 장악한 빨치산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 사살 사건을 총 지휘했다. 1951년 1월 칠보 발전소 전투가 발생, 6·25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가운데 빨치산 2,000여명이 발전소를 포위했다. 남한 유일의 전기를 수급하는 수력발전소인 칠보발전소가 속수무책으로 적의 손에 넘어갔을 때 18전투대대장인 차일혁 경무관(당시 총경)은 망설임 없이 75명의 병력을 이끌고 50여일 간 생사를 초월한 전투로 빨치산을 격퇴하고 칠보발전소를 탈환했다.6ㆍ25전쟁 정전이 체결된 이후에
김재옥 교사는 1950년 5월에 충주사범학교를 졸업한 지 한 달 뒤인 6월 20일 충주 동락초등학교 교사로 부임했다.그러나 부임 5일 만에 6·25전쟁이 발발했고 김 교사는 동락초등학교에 머물며 학교를 지켰다.1950년 7월, 북한군의 남하에 대응하기 위해 연합군이 파견됐지만 전세는 달라지지 않았고, 북한군은 음성군 무극리까지 점령해 내려왔다.충주방면으로 진출하던 북한군은 7월 6일 동락초등학교에 이르러 무기와 탱크를 학교 교정에 집결해 놓고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당시 국군은 지연전투를 벌이고 있었으며 국군 7연대가 음성 북쪽에서
김창학 해군 하사는 1948년 6월 해군 신병 제10기로 입대해 제1함대 701함 조타수로 복무했으며, 6․25전쟁 당일 대한해협 해전에 참전했다.1950년 6월 25일 김창학 해군 하사가 탑승한 백두산함은 부산 동북방 30마일 해상에서 병력 600여 명과 탄약 및 식량을 가득 싣고 남하중인 1,000톤 급의 북한 무장선박을 발견했다. 백두산함은 북한의 무장선박을 저지하기 위해 4시간여에 걸친 치열한 교전을 벌였으며 6월 26일 새벽 부산 동남방 11마일 해상에서 이를 격침시키는데 성공했다.김창학 하사는 이 교전에서 적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