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월 25일 북한군 1군단은 서울을 점령하고, 2군단으로 하여금 춘천-홍천-수원으로 내려와 국군의 퇴로를 차단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이 계획에 따라 북한군 1군단은 서울로 진격해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했으며, 2군단은 춘천으로 진격해 26일 오전 춘천을 점령코자 했다.

이때 북한군의 춘천진격을 1시간 이상 저지시켜 북한군의 진격을 늦추고 국군 제6사단의 주저항선 구축에 기여해 북한군의 계획을 수포로 만든 전투가 1950년 6월 26일의 내평지서 전투다.

당시 화천에서 춘천으로 가는 46번 도로 내평리 마을 한복판에 위치한 내평지서에는 지서장인 노종해 경위(전사 후 경감 추서)를 포함해 12명의 경찰관과 대한청년단 단원 3명이 있었다.

전투 당일 내평지서는 통신마저 끊기고 고립됐지만 노종해 경위를 포함한 15명은 죽음을 각오하고 1만명이 넘는 북한군 제2사단과 1시간 이상 치열한 교전을 벌였다.

북한군은 급기야 82밀리 박격포를 대거 동원해 폭격을 시작했고, 내평지서를 완전 폐허로 만든 다음에야 점령할 수 있었다.

이 전투로 노종해 지서장을 포함한 12명이 전사했다. 우리 국군의 주저항선 구축에 크게 기여한 내평지서의 결사항전이 없었다면 춘천이 북한군에게 쉽게 함락됐을 수도 있었으며, 북한의 초기 작전을 실패하게 만든 주요 전투다.

이런 점에서 내평지서 전투는 춘천전투에서 큰 의미를 갖는 전투였으며 전사에 길이 남을 전투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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