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부택 소장은 1946년 육군사관학교(국방경비사관학교) 제1기생으로 소위로 임관해 1950년 1월 제6사단 제7연대장으로 부임한 후 북괴군의 남침 징후를 사전에 인지하고, 춘천 주민과 학도호국단의 지원을 받는 등 민·관·군 협력 하에 소양강변 등에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사전 전투준비 태세를 갖췄다.임 소장의 준비로 인해 개전 이후 국군은 북한강과 소양강 북방을 고수하며 막강한 화력의 북한군을 막아내는 성과를 올렸다. 6·25전쟁 초기 3일간 춘천지역에 대한 7연대의 성공적인 방어는 수도권에 투입된 국군 주력부대가 전열을 재정비하고 한
신건식·오건해 선생 부부는 그들 자신이 독립운동가이며, 딸 신순호, 사위 박영준, 형 신규식, 조카 신형호, 사돈 박찬익 등 가족이 모두 독립운동에 나선 명문가문이다.신건식 선생은 충북 청원군 출신으로 무관학교와 관립한성외국어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상하이로 망명한 후 항저우에 있는 의약전문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했다. 1912년 신채호, 신규식 선생 등이 국권회복을 위해 조직한 동제사 활동에 참여하고, 중국군 장교로 생활하며 난징에 거주하는 독립운동가와 학생 등의 숙식 경비를 지원하다 1939년 제31회 의정원회의에서 충청도의원으로
김현숙 대령은 평양 출신으로 일본 동경체육전문학교를 졸업하고 평양 강동여자중학교에서 체육교사로 근무했다. 이후 1949년 예비역 육군 소위로 임관했으며, 국방장관실에 보직돼 지리산 공비토벌작전 때 생포한 여자공비의 전향을 위해 계몽활동을 전개하던 중 6·25전쟁을 맞았다.수많은 어린 남학생들이 군에 입대하는 모습을 보고 여자라고 해서 가만히 있을 수 없다고 판단한 김 대령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여자의용군 모집을 건의했고, 1950년 8월 여자의용군 모집에 관한 담화를 직접 발표했다. 1950년 9월 육군 제2훈련소 예속으로 여자의용군
윤현진 선생은 1892년 경남 양산 출신으로 어린 시절 만성재에서 한학을 수학하고 15세가 되던 1907년 구포의 구명학교에서 신학문을 배웠다.1909년 중국 상하이와 베이징을 탐방한 뒤 깊이 있는 신학문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일본 유학을 떠난 선생은 22세에 일본 메이지 대학에 입학했다. 이후 조선유학생학우회와 일본제국주의 타도를 목적으로 결성된 신아동맹당 당원으로 반일운동에 앞장섰다. 1916년 고국으로 돌아온 선생은 약 3년 간 대동청년단, 백산무역주식회사, 의춘상행, 기미육영회 등과 관계를 맺고 비밀결사운동, 경제적자립운동,
타흐신 야즈즈 준장은 터키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제1차 세계대전, 터키 독립전쟁, 6·25전쟁에 참전했다. 6·25전쟁 당시에는 준장으로서 터키여단을 지휘했다.1950년 10월 17일 부산항에 도착한 터키여단은 군우리 전투와 평양철수작전, 장승천 전투, 사기막 전투, 네바다 전초전 등 한반도 도처에서 수차례 공방전을 거듭하며 격전을 치렀다. 특히 야즈즈 준장이 지휘한 터키여단은 유엔군의 대규모 위력 수색작전인 썬더볼트 작전에서 김량장리와 151고지전투, 수리산전투를 승리함으로써 유엔군의 전체 작전에 크게 기여했다.용인의 김량장리와
선생은 황해도 은율군 출신으로 1919년 1월 경성 시내 전문학교 학생대표 회동에 참석하면서 국제정세와 시국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으며, 2월 초 독립운동에 참가할 것을 결심했다.당시 미국대통령이 제안한 민족자결주의와 고종이 독살됐다는 소문이 퍼지자 민족대표를 중심으로 만세운동이 추진됐는데, 선생은 만세운동을 위해 학생 조직의 필요성을 느끼고 각 중등학교 대표를 뽑아 학생들을 결속시켰다. 선생은 학교별로 독립선언서 운반과 배포장소를 정하는 한편 학생대표를 중심으로 2차 만세시위를 3월 5일 남대문역(현 서울역)에서 전개하기로 결의했
6·25전쟁 당시 현시학 소령은 PC-703함(삼각산)부장 직책 수행 중 서해안 봉쇄작전에서 1950년 7월 27일 옹진방면으로부터 남하 중인 적 수송선단 12척을 PC-702함(금강산)과 협동해 격퇴했다.그는 1950년 8월에는 인천상륙작전 이전에 실시된 도서탈환 작전의 성공에 기여했으며, 고성에서 통영으로 진출하려는 적을 맞아 정교한 함포사격을 가해 적 공격을 차단함과 동시에 통영을 수복하기 위한 아군 해병대의 통영상륙작전 전승에 크게 기여했다.PC-704함(지리산) 함장 임무 중에는 1951년 1월, 황해도 월사리에서 피난민
김규면 선생은 1880년 함북 경흥의 빈농가정에서 막내로 태어났다. 선생은 생업을 잇기 위해 원산으로 이주했으며 당시 독립교회 선교사인 펜윅을 만나 기독교에 입문하고 선교사로 활동했다. 1907년 선생은 가족과 함께 훈춘으로 망명해 대한기독교회 소속의 전도사로 활동하며 국내의 서북학회와 비밀결사 신민회 등에 가입했다.1915년 대한기독회가 일제의 포교 규칙에 굴복하자 선생은 ‘대한성리교회’를 만들고 복음서를 판매해 독립운동자금을 모으며 현해주와 만주지역 독립운동 세력과 연대했다.1922년 선생은 중국으로 건너가 상해청년동맹회를 조직
마리누스 덴 오우덴 중령은 네덜란드 왕립 육군사관학교 졸업 후 소위로 임관해 수많은 전투를 치른 후 1950년 6월 한국전에 참전하기 위해 조직된 유엔군의 네덜란드 대대에 자원했다. 네덜란드는 6·25전쟁을 위해 우리나라에 1척의 구축함과 5,322명의 군대를 파견했다.1950년 10월 21일 오우덴 중령은 당시 소령으로 네덜란드 대대의 지휘관으로 임명돼 1950년 11월 23일 부산항에 도착했다.오우덴 중령과 그의 대대는 전선의 급박한 상황으로 인해 부산에 도착한지 일주일만에 전선으로 파견됐으며, 12월 중순의 혹한 속에서 미 제
조지 애쉬모어 피치 선생은 1883년 1월 중국 쑤저우에서 장로교회 목사로 활동하던 조지필드 피치의 2남 3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선생은 1909년부터 중국 상하이 YMCA에서 활동하며 여운형 선생을 주중 미국 대사 크레인에게 소개시켜주는 등 한국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또한 1919년 미국에서 한인구제회가 모금에 어려움을 겪자 아버지와 함께 대한적십자사를 통해 당시 중국의 외국인 선교사들을 모아 적극적인 모금에 나섰고, 상하이에 설립된 한인학교인 ‘인성학교’가 재정적 어려움에 처하자 모금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선생은 1932년 4월
6·25전쟁 발발 다음날 우리 공군의 이근석 대령 등 10명은 미군으로부터 F-51 무스탕 전투기 인수를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당시 미국이 제의한 F-51 전투기 인수 조종사 선발조건은 ‘훈련 없이도 전투기를 탈 수 있는 조종사’였는데, 인수에 참여한 10명 중 자격을 갖춘 조종사로 김신 중령이 유일했다. 미 공군에서 F-51로 훈련받은 경험이 있었던 김 중령은 통역과 함께 비행기에 대한 기초적 설명을 맡아 비행훈련 진행과 전투기 인수에 크게 기여했다. 단 한 번의 비행훈련 끝에 전투기를 인수해 7월 2일 귀국한 김 중령 등은
김치보 선생은 1859년(철종 10년) 9월 평안남도 평양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1908년 경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한 후 덕창국이라는 한약방을 운영하며 독립운동에 투신했고, 선생의 한약방은 한인독립운동가들의 사랑방 역할을 했다.선생은 1909년 국민회 블라디보스토크 지방회 회원으로 활동했다. 당시 국민회에는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참여해 쇠락한 정부를 계승한 ‘임시정부’를 자임했으며, 청년돈의회는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하는 단체였다. 선생은 이 단체에서 활동하며 현지 한인에 대한 교육 활동 등에 힘을 쏟았다. 1910년 8
감봉룡 경감은 6·25전쟁 발발 당시 황해도 개성지역 철도경찰대장으로 근무 중이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군의 공세가 시작됐고, 적 정예 제1사단, 제6사단과 13대의 T-34전차의 집중 공세를 막아내지 못한 국군 제12연대는 김포반도로 철수해야 했다.당시 개성경찰서 병력도 대대와 함께 철수했는데, 이때 감 경감이 지휘하는 철도경찰대 전 대원 50명은 본부를 사수하기로 결의하고 본부 주변의 요충지를 점거해 방어태세를 갖췄다.개전 후 처음으로 조직적 저항을 받은 북한군은 철도경찰대의 완강한 저항에 다른 통로로 진출하
선생은 1860년 홍성의 사족집안에서 태어나 부친에게서 한학을 수학했고 이후 독학으로 학문을 이뤘다.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항거해 일어난 홍주의병에 참여했으며, 김복한 등 주도자가 체포된 뒤에는 조의현 등과 재기를 시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울분에 쌓여 천식과 함께 다리가 마비되는 병을 얻었다.선생은 을미의병 이후 홍주의병을 기록한 ‘을미록’, ‘절의가’ 등 여러 항일 사적을 편찬했다. ‘을미록’은 그가 을미의병 이후 1895년 홍주의병의 과정을 기록한 글이며, ‘절의가’는 삼강오륜을 지키고 사람과 짐승, 오랑캐를 구별
벨기에 상원의원이자 국방장관으로 재직 중이던 앙리 모로 드 믈랑은 1950년 6·25전쟁 지원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열린 국무회의에서 장비만 지원하자는 다수의 제안을 일축하고 파병을 주도했다. 벨기에는 그해 7월 1개 보병대대 파병을 관철했다.그는 국방부 장관직을 사임하고 1951년 직접 총을 들고 6·25전쟁에 참전하기까지 했는데 소령으로 복귀해 참전한 당시 그의 나이 50세 였다. 벨기에는 그의 6·25전쟁 참전을 위해 상원의원의 해외 참전을 금지한 당시 법률을 개정했다. 당시 벨기에군은 미 제3사단 예하 영국 제29보병여단에 배
채상덕 선생은 황해도 출생으로 1910년 경술국치 이후 만주로 망명해 대한통군부 총장, 대한통의부 부총장, 의군부 총장을 역임하며 만주에서 독립을 위해 헌신했다.1910년대에 독립의군부가 와해되자 국내에서 활동이 어렵다고 판단해 압록강을 넘어 남만주로 망명했고, 1922년 대한통군부 총장에 선임됐다. 이후 대한통의부 부총장으로 선임돼 이주한인사회를 복원하고 만주 한인의 삶을 지원했다. 그러나 통의부 내에서 이념과 노선의 갈등이 발생했고, 복벽주의 계열 인사들은 1923년 통의부를 이탈해 대한의군부를 조직해 선생을 총재로 추대했다.1
1952년 10월 국군 제9사단과 중공군 제38군 예하 3개 사단은 철원평야 서북단의 백마고지에서 치열한 고지 공방전을 전개했다. 백마고지 전투는 10일 동안 고지의 주인이 24번이나 바뀌고 하루 평균 5만발 가량의 포탄이 작렬한, 세계 전쟁사에서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일진일퇴의 혈전이었다.1952년 10월 11일 국군 제9사단 제29연대 제2대대장인 김경진 소령은 사단장으로부터 불과 1시간 전 제1대대가 물러났던 정상을 탈환하라는 명령을 받고 역습을 감행했다. 그는 고지 정상의 중공군이 진지보강 작업을 시작하기도 전에 빗발치는
고운기(본명 공진원) 선생은 함경남도 문천 출생으로 아버지인 공창준 선생은 을사늑약 직후 홍범도 장군과 의병을 일으켜 함경도 각지에서 일본군과 맞서 무장투쟁을 전개한 인물이다. 선생은 1908년 홍범도 의병부대가 만주지역으로 이동할 때 아버지를 따라 망명했고, 이후 하얼빈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청년운동과 교육사업에 종사했다. 1931년 한국독립군 제6중대장으로 중국의 반만항일군과 연합해 대일항전을 전개했으며 1932년 서란현전투에서 일본군 1개 분대를 전멸시키는 전과를 거두기도 했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독립운동의
김용식 일등병은 1950년 8월부터 9월까지 이어진 기계-안강전투에서 습격 임무를 수행할 특공대에 자원했다. 기계-안강전투는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 방어선을 형성하고 있던 기계와 안강 등지에서 북한군 제12사단의 남진을 저지한 전투다.이 전투과정에서 군사적 요충지인 비학산을 탈환하려는 아군의 작전에 북한군이 완강히 저항하자 김 일등병이 소속돼 있던 부대에 습격임무가 주어졌다. 당시 그는 수도사단 제17연대에 배치된 지 며칠 안 된 신병이었지만 돌격작전에 뛰어들었다. 김 일등병은 전투경험이 거의 없었으나 작전에서 큰 활약을 펼쳤다.
김수민 선생은 경기도 장단 북면 솔랑리 양반가문에서 태어나 농업에 종사하던 농민이었다.선생은 어려서 무예에 능하고 용력이 뛰어났으며 사격술과 전술에 능했다. 의병으로 활동하기 전 선생은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해 일본을 상대로 싸웠고, 광무황제의 강제 퇴위와 대한제국군대의 해산을 계기로 경기도 장단 지역에서 인근의 산포수와 농민들을 중심으로 의병을 일으켰다. 1908년 2월 서울진공작전이 무산된 뒤 선생을 휘하 의병부대를 이끌고 장단군 구화장을 근거지로 양주, 포천 등 경기 동북구 지역 연합의병을 형성해 의병운동을 전개하면서 일본군의 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