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현진 선생은 1892년 경남 양산 출신으로 어린 시절 만성재에서 한학을 수학하고 15세가 되던 1907년 구포의 구명학교에서 신학문을 배웠다.

1909년 중국 상하이와 베이징을 탐방한 뒤 깊이 있는 신학문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일본 유학을 떠난 선생은 22세에 일본 메이지 대학에 입학했다. 이후 조선유학생학우회와 일본제국주의 타도를 목적으로 결성된 신아동맹당 당원으로 반일운동에 앞장섰다.

1916년 고국으로 돌아온 선생은 약 3년 간 대동청년단, 백산무역주식회사, 의춘상행, 기미육영회 등과 관계를 맺고 비밀결사운동, 경제적자립운동, 교육운동을 주도했다.

3·1운동 직후인 1919년 3월 21일 중국 상하이로 망명한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무위원과 경상도위원, 국내 항일세력과 연락을 위한 의용단 조직, 독립신문 발기인 등을 맡으면서 임시정부의 중심인물로 부상했다.

이후 1921년 2월 임시정부에서 초대 재무차장에 취임해 살림을 책임지는 등 독립운동에 혼신의 노력을 다하던 선생은 같은 해 9월, 과로를 이기지 못하고 29세의 젊은 나이로 별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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