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은 황해도 은율군 출신으로 1919년 1월 경성 시내 전문학교 학생대표 회동에 참석하면서 국제정세와 시국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으며, 2월 초 독립운동에 참가할 것을 결심했다.

당시 미국대통령이 제안한 민족자결주의와 고종이 독살됐다는 소문이 퍼지자 민족대표를 중심으로 만세운동이 추진됐는데, 선생은 만세운동을 위해 학생 조직의 필요성을 느끼고 각 중등학교 대표를 뽑아 학생들을 결속시켰다.

선생은 학교별로 독립선언서 운반과 배포장소를 정하는 한편 학생대표를 중심으로 2차 만세시위를 3월 5일 남대문역(현 서울역)에서 전개하기로 결의했다.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이 유혈충돌을 우려해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을 하자 선생을 비롯한 학생대표는 자체적으로 독립선언을 하고 남대문과 대한문 양쪽으로 행진하며 만세운동을 벌였다.

선생은 미리 결의한 대로 5일 남대문역 광장에서 다시 만세시위가 시작되자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큰 깃발을 들고 약 1만여 명의 군중을 이끌다 일제에 체포돼 2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이후 잡지 ‘신생활’과 일간지 시대일보 창간에 참여했으나 일제에 의해 폐간되는 등 실패하자 낙향해 1928년 별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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