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운기(본명 공진원) 선생은 함경남도 문천 출생으로 아버지인 공창준 선생은 을사늑약 직후 홍범도 장군과 의병을 일으켜 함경도 각지에서 일본군과 맞서 무장투쟁을 전개한 인물이다. 선생은 1908년 홍범도 의병부대가 만주지역으로 이동할 때 아버지를 따라 망명했고, 이후 하얼빈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청년운동과 교육사업에 종사했다.

1931년 한국독립군 제6중대장으로 중국의 반만항일군과 연합해 대일항전을 전개했으며 1932년 서란현전투에서 일본군 1개 분대를 전멸시키는 전과를 거두기도 했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독립운동의 역량을 한 곳으로 집중해 대일항쟁을 전개해야 한다는 논의가 있은 후 조선혁명당,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재건)이 연합해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가 결성됐다. 이때부터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관계를 맺게 됐다.

선생은 1938년 유주에서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 대장을 맡아 중국인을 대상으로 선전활동을 통해 항일의식을 고취시키고 항일투쟁에 참여시켰다.

1940년 중경에서 광복군이 창설되자 제2지대장에 임명돼 서안에서 병력을 모집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징모제2분처의 책임을 맡아 한인 청년을 모집했다.

1942년 중경으로 다시 돌아온 선생은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하면서 광복군의 자율적인 활동을 제한하던 ‘9개준승’을 취소시키는 작업을 추진하다 병을 얻어 1943년 37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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