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민 선생은 경기도 장단 북면 솔랑리 양반가문에서 태어나 농업에 종사하던 농민이었다.

선생은 어려서 무예에 능하고 용력이 뛰어났으며 사격술과 전술에 능했다.

의병으로 활동하기 전 선생은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해 일본을 상대로 싸웠고, 광무황제의 강제 퇴위와 대한제국군대의 해산을 계기로 경기도 장단 지역에서 인근의 산포수와 농민들을 중심으로 의병을 일으켰다.

1908년 2월 서울진공작전이 무산된 뒤 선생을 휘하 의병부대를 이끌고 장단군 구화장을 근거지로 양주, 포천 등 경기 동북구 지역 연합의병을 형성해 의병운동을 전개하면서 일본군의 헌병분파소를 파괴하는 등 전과를 올렸다.

1909년 3월 ‘창의도독부사령장겸군량관’ 명의로 격문을 보낸 이후 의병부대의 재편과 의병운동의 새로운 시도가 일어나 선생이 직접 서울에 잠입해 서울의 정세를 살피고 총기와 군수품을 구입했다. 선생의 서울 잠입이 일제에 의해 포착돼 고양군 하도면으로 피신했으나 1909년 8월 12일 경성 필동헌병대에 발각돼 부하 2명과 함께 체포됐다.

선생은 헌병대 사령부의 취조를 받으며 모진 고문 속에서 “나를 죽일 지 살릴 지 빨리 결정할 것이고, 나에 대해 장황하게 질문해도 답할 것이 없다”며 끝까지 동료 의병을 보호했다. 선생은 같은 해 12월 17일 교수형으로 순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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