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관묵 경감은 1927년 강원도 양구군에서 태어나 경찰에 임용됐다. 6·25전쟁 당시 양구전방은 백석산지구 전투, 양구 동북방 피의능선 전투 등이 치열하게 진행되고 있었고, 조관묵 경감은 춘천 경찰서 양구파견대 중대장으로 대원 30여 명과 함께 양구지역의 치안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1950년 9월 28일 서울수복과 동시에 춘천이 수복되자 조관묵 경감은 인민군 제10사단 소속 1개 연대 4,000여 명의 패잔병과 대치하며 양구군 소재지를 사수하던 중 패잔병의 습격을 받아 강원도 춘성군 북산면 내평리까지 후퇴했다.조 경감은 다시 반격을
안창호 선생은 1878년 11월 9일 평안남도 강서군 초리면에서 태어났다. 1902년 결혼 직후 미국으로 건너간 선생은 언론활동과 교육진흥, 실업진흥 등 여러 가지 구국사업을 전개했고, 조국 독립을 추구한 국내 비밀결사인 신민회 활동에도 참여했다.1913년 5월 선생은 흥사단 출범을 주도했으며, 흥사단은 독립운동을 위한 조직적 재정후원과 일꾼양성을 통한 민족독립의 사명 완수에 매진했다.1919년 3·1운동 소식이 미국에 전달되자 선생은 ‘3·1운동을 계승하자’라는 연설을 통해 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민족자결주의의 공포, 파리평화회
콘라도 디 얍(Conrado D.Yap) 대위는 필리핀 제10대대전투단 특수중대 중대장으로 1951년 4월 경기도 연천 북방의 율동전투에 참가했다.율동전투는 중공군의 제5차 공세에 맞서 1951년 4월 22일부터 23일까지 연천 북방의 율동에서 중공군의 공격을 저지한 방어전투다.이 전투에 참여한 필리핀 제10대대전투단은 수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강인한 정신력으로 중공군의 공격을 저지해 인접 부대들이 철수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하고, 중공군 500여 명을 사살하거나 부상을 입히는 전과를 거뒀다.콘라도 디 얍 대위는 퇴로 차단의 위기에
손병희 선생은 1861년 충북 청원(청주)에서 출생해 1882년 동학에 입문해 전봉준과 함께 동학농민혁명의 기수로 활약했다.선생은 1905년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고 국권을 수호하고, 또 회복하기 위해 민족을 계몽하는 운동에 관심을 기울였다. 선생은 보성학교와 동덕여학교를 비롯한 수십개의 남녀학교를 인수 또는 신설해 운영했다.1919년 1월 선생은 동경유학생의 2·8독립선언계획과 신한청년당 및 기독교계의 독립운동 계획을 듣고 독립선언 방식의 운동을 벌이기로 결정했다. 선생은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시위를 전개함으로써 독립에 대한 열망
케네스 뮤어 영국 육군 소령은 1950년 아길 엔 서들랜드 하이랜더스(Argyll and Sutherland highlanders, 이하 아길대대) 부대대장으로 부산항에 상륙해 6·25전쟁에 참전했다. 소령은 대구시 달성구 일대의 낙동강방어선에 배치돼 임무를 수행했다.케네스 뮤어 소령이 속한 아길대대는 9월 23일 성주 동남쪽 신부리 일대의 282고지와 389고지를 공격하게 됐다. 북한군의 강력한 저항으로 아길대대 B·C중대가 위기에 처하자 소령은 2개 중대의 통합지휘를 자청해 전투부대를 재편성하고 직접 지휘했다.고립무원의 상황에서
김마리아 선생은 일본으로 건너가 유학생활을 하던 중 1918년 동경 2·8독립선언에 참여했다. 이후 2·8독립선언문 10여장을 복사해 국내로 들여온 선생은 교육계 지도자 등을 만나 재일 동경 유학생들의 독립운동에 대해 보고하고, 국내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했다.선생은 3·1운동이 일어난 날에도 여성들에게 독립운동 참여를 촉구했고, 일경에 의해 배후 지도자로 지목돼 체포됐다. 선생은 출감 후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면서도 조국 독립의 꿈을 잃지 않고, 대한민국애국부인회 회장으로 선임돼 조직 확대와 여성독립운동의 활성화에 힘썼다.선생은 이후
김한준 대위는 6·25전쟁이 발발하자 제7사단 제8연대 소속으로 평양 탈환작전에 참여해 풍부한 전투경험과 지휘 능력을 인정받아 육군 소위로 현지 임관했다.6·25전쟁의 전 기간을 전장에서 보낸 김한준 대위는 “전투는 상하 간의 신뢰로 이뤄진다. 지휘관이 부하를 믿고 신뢰해야 자신을 사지로 몰아가는 명령이라 해도 부하는 따르게 된다”는 전투철학을 신조로 삼았다.그는 지휘관으로서 서로에 대한 신뢰를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했다.휴전협상이 막바지에 달했던 1953년 7월 13일, 중공군은 전략적 요충지인 강원도 금성천 부근을 장악하기 위해
유상근 선생은 한학을 공부하다 집안 사정으로 북간도, 용정촌 등으로 이주하다 19세 되던 해 하얼빈으로 갔다. 1930년 경 상하이로 옮긴 선생은 그곳에서 김구 선생을 만났고, 그의 도움으로 영국인이 운영하는 버스회사의 검표원으로 취직했으나 생활이 어려워 홍콩과 광둥지방을 오가며 인삼장사를 하며 생활을 이어갔다.이때 중국정부가 1931년 9월 18일 만주를 침략한 일본을 국제연맹에 제소하는 일이 발생했다. 국제연맹은 릿튼을 위원장으로 하는 조사단을 파견하기로 결정했고, 조사단이 5월 26일부터 다롄으로 파견된다는 정보가 입수됐다.
에드워드 포니 대령은 6·25전쟁 당시 인천상륙작전의 주 설계자였으며 미 해병대에서 가장 지식이 풍부한 수륙양면작전의 전문가였다.포니 대령은 포항상륙작전 당시 제1기병사단의 하역과 상륙에 관한 계획을 준비했으며, 1만 명이 넘는 병력과 2,000대 이상의 차량이 포항에 상륙했는데 이는 부산지역 방어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또한 전투 역사상 최대 규모의 민간인 해상 탈출 작전인 흥남철수작전에서 장비, 보급품, 병력의 철수를 조직적으로 이끈 제10군단 지휘단의 책임관으로 활약하며 흥남에 발이 묶여 있던 약 10만 명의 피난민을 무사히
조경환 선생은 유학을 공부한 학자로 1907년 12월 김준 의진에 합류해 좌익장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좌익장을 맡은 선생은 함평읍. 창평 무동촌, 장성 낭월산, 영광 월암산, 광주 어등산 등 수많은 전투에서 선봉장으로 활약했다.1908년 어등산에서 일본군과 교전 중 의병장 김준이 순국하고, 일본군이 추격해오자 함평 당산촌 나평집으로 후퇴해 후일을 도모했다. 일본군의 진압작전이 종료되고 감시망이 느슨해지자 흩어진 의병들을 다시 모아 정비하기 시작했고, 이때 전북 이석용 의진에서 활동하던 전수용과 연합해 용진산에서 200여 명 규모로
박기석 이등중사와 최재효 하사는 국군 제9사단 29연대 3대대 9중대원으로 1951년 11월 4일 중공군에게 뺏긴 주저항선 상의 281고지를 탈환하는 작전에 참가했다.박 이등중사와 최 하사가 소속된 제9중대가 정상 20m쯤에 다다랐을 때 중공군은 모든 자동화기를 동원해 아군의 돌진을 필사적으로 저지했다. 이때 박 이등중사가 중대장에게 적의 자동화기 진지를 격파하기 위한 특공대를 조직하겠다는 허가를 받고 최 하사 등 4인을 선발했다. 박 이등중사와 최 하사가 먼저 절벽에 올라 2개의 적 기관총 진지를 각각 수류탄으로 파괴하고, 뒤이어
현천묵 선생은 함경북도 경성군에서 1906년 보성학교 학감으로 본격적인 교육활동을 시작했고, 1909년 보성학교의 교장과 경성향교에서 일하며 지역의 중심인물로 부상했다.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된 1907년 이후 계몽단체인 대한협회 경성지회에 참여해 이후 지회장을 맡으면서 경성지회의 활동을 공고히 시키고 교육 사업에 힘을 기울였다. 선생은 교육과 자강을 통해 구국의 방법을 모색했으며 경성의병을 지원하는 한편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등 항일전선에 앞장섰다. 선생은 1909년 대종교에 입교한 뒤 북간도로 망명해 서일과 함께 중광단을 조직하고
딘 헤스 대령은 한국 공군과 함께 최전방에서 전투를 수행하고, 한국 공군이 독자적인 작전능력을 갖춘 뒤에는 훈련과 감독 임무를 수행한 미 공군 제6414부대의 지휘관으로 전신인 바우트 원(Bout-One)부대 시절부터 이 부대를 지휘했다.딘 헤스는 전투기가 부족하다는 상부의 압박이 들어올 때마다 교육 중인 한국 조종사들과 함께 전투기를 타고 출격해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왔다. 그는 훈련부대에 속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1951년 6월 한국을 떠날 때까지 무려 250회나 출격하며 각종 전투임무를 수행했다. 1950년 10월 중령으로 진급한
최용덕 선생은 서울 출신으로 경술국치 이후 중국 북경으로 건너가 새로운 사상을 익혔고, 1916년 중국 육군군관학교를 졸업한 후 단기서 군의 제2사단에서 복무했다. 중국에서 1919년 3·1만세운동 소식을 접한 선생은 중국 베이징을 중심으로 대한독립청년단 단원 모집에 힘썼다. 1921년 4월 의열단에 참여한 선생은 김원봉 단장과 함께 1922년 의열단의 국내거사를 준비해 김상옥 의사의 조선총독부 폭탄 투척 의거를 지원했다. 이후 베이징에서 민족유일당 운동에 참여, 1926년 10월 대독립당조직북경촉성회 결성에 기여했다.1940년 9
박정모 대령은 1946년 해군 1기로 입대해 6·25전쟁이 발발하자 해병대 소대장으로서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했다.이어 박 대령은 1950년 9월 27일 새벽 해병 제2대대 제6중대 1소대장으로서 서울탈환작전에 참여, 소대원들과 함께 치열한 교전을 벌였다.박 대령은 중앙청 내의 적을 제압하고 중앙청 옥상에 걸려 있던 인공기를 내리고 서울 수복의 상징인 태극기를 게양했다.박 대령과 동료가 올린 태극기 게양은 6·25전쟁사의 극적인 한 장면으로 남았으며, 국내외에 보도된 이 사진은 승전을 위한 국군과 유엔군의 의지를 보여주는 단면으로 평가
김교헌 선생은 18세에 정시문과 병과에 급제하고, 1898년부터 독립협회에 몸담기 시작했다. 독립협회 간부진이 고종과 내각을 대상으로 개혁내각 수립과 의회개설운동을 요구하다 구속되자, 독립협회 대표위원으로 민중계몽에 앞장섰다.1906년 동래부사에 임명돼 부산으로 내려간 선생은 통감부의 비호 아래 일본인들이 한인을 대상으로 경제적 침탈과 만행을 자행하는 것을 목격하고 횡포를 제지하다가 친일파 송병준의 모함을 받고 해직됐다.이후 1910년 대한제국이 일본에 강제합병 당하자 대종교에 입교해 신단실기와 신단민사를 저술했는데, 이 책은 단군
허봉익 대위는 안동지구전투에서 중대장으로 참전해 2개 소대를 이끌고 북한군 2개 대대와 백병전을 전개해 1개 중대의 북한군을 격멸하는 전과를 거뒀다.7월 31일 새벽 북한군 제12사단은 전차를 선두로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했으며, 이 무렵 육군본부는 낙동강방어선 형성계획에 따라 7월 31일 24시를 기해 안동에서 철수하기로 결정하고 명령을 하달했다.이에 따라 제8사단은 낙동강전선으로 철수작전 진행 중 제16연대는 북한군과 치열한 접전을 벌이다 철수명령을 뒤늦게 전달받았다. 연대는 북한군에게 포위돼 각개로 철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
연미당 선생은 1908년 북간도에서 태어나 임시정부 공립학교인 인성학교를 졸업하고 1927년 7월 독립운동가 엄항섭 선생과 결혼했다.결혼 이후 선생은 남편을 내조하며 자녀들의 교육과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며 살다가 1927년 11월 상해에서 결성된 중국본부한인청년동맹에 참여하며 독립투사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선생은 여성들의 독립운동 참여를 독려하고 역량을 결집시키기 위해 상해여자청년동맹에서도 활동했다.선생은 임시정부가 중국 가홍 등지로 이동할 때 폐결핵으로 고생하던 이동녕 선생과 장사 남목청에서 피습당한 김구 선생을 극진히 간호하는
1950년 7월 적의 대대적 공세에 강원도 경찰은 대부분 남하했지만 강원도비상경비사령부는 화력발전소가 있는 영월을 방어하기로 결정하고 영월지역에 남았다.영월지역에서는 7월 2일부터 수차례의 공방전이 계속됐으며, 영월지구 전투부대의 투혼으로 일시 영월 점유에 성공했으나, 적의 반격으로 영월을 포기하고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영월 탈환의 집념을 버리지 않고 7일 아침 김해수 경감을 대장으로 47인의 결사대를 편성해 영월 재공격을 준비했다.김해수 경감은 남하하는 북한군을 지연시키고 영월지역이 중요한 위치임을 고려한 사령관의 명령을
이대위 선생은 평안남도 강서에서 출생해 평양 숭실학당을 졸업한 후 1903년 미국 유학길에 올라 한인 최초로 캘리포니아대학교에서 역사학을 전공했다.이후 선생은 샌프란시스코 한인감리교회 전도사가 됐고, 목사 인수를 받은 후부터 교포사회의 지도자로 부상했다. 1913년 미주한인단체인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총회장에 취임해 브라이언 국무장관에게 ‘미주 한인이 한일 강제병합 이전에 미국으로 이주했으므로 일본인과 국적을 구분해 줄 것’을 요구해 관철시켰다. 선생은 이후 1915년부터는 ‘신한민보’ 주필로 활동하며 한글식자기를 발명해 미주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