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마리아 선생은 일본으로 건너가 유학생활을 하던 중 1918년 동경 2·8독립선언에 참여했다. 이후 2·8독립선언문 10여장을 복사해 국내로 들여온 선생은 교육계 지도자 등을 만나 재일 동경 유학생들의 독립운동에 대해 보고하고, 국내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선생은 3·1운동이 일어난 날에도 여성들에게 독립운동 참여를 촉구했고, 일경에 의해 배후 지도자로 지목돼 체포됐다. 선생은 출감 후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면서도 조국 독립의 꿈을 잃지 않고, 대한민국애국부인회 회장으로 선임돼 조직 확대와 여성독립운동의 활성화에 힘썼다.

선생은 이후 중국 남경대학에 입학해 공부를 계속 하면서 상해의 대한애국부인회에 참여해 활동하는 한편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황해도 대의원으로 선출돼 활약했다.

1923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선생은 1928년 2월 12일 황애덕, 박인덕 등 현지에서 유학 중인 여학생들을 중심으로 여성독립운동단체인 근화회를 조직, 활동했다. 1932년 귀국한 선생은 종교모임과 강론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등 지속적으로 항일투쟁을 전개으나 선생은 고문 후유증으로 1944년 3월 13일 순국했다.

정부는 1962년 선생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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