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교헌 선생은 18세에 정시문과 병과에 급제하고, 1898년부터 독립협회에 몸담기 시작했다. 독립협회 간부진이 고종과 내각을 대상으로 개혁내각 수립과 의회개설운동을 요구하다 구속되자, 독립협회 대표위원으로 민중계몽에 앞장섰다.

1906년 동래부사에 임명돼 부산으로 내려간 선생은 통감부의 비호 아래 일본인들이 한인을 대상으로 경제적 침탈과 만행을 자행하는 것을 목격하고 횡포를 제지하다가 친일파 송병준의 모함을 받고 해직됐다.

이후 1910년 대한제국이 일본에 강제합병 당하자 대종교에 입교해 신단실기와 신단민사를 저술했는데, 이 책은 단군을 중심으로 한 민족서사로 망국 이후 우리 국민들에게 애국혼을 고취했다.

1919년 2월에는 대종교 교주로서 대종교 주요 인사와 해외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가와 뜻을 모아 ‘대한독립선언서’를 작성하고, 이를 통해 세계 각국에 한일합방이 무효이며 향후 수립될 국가는 자주·독립적인 민주공화제에 기반을 둘 것임을 분명히 밝혔다.

같은 해 10월에는 북로군정서에 참여해 홍범도, 김좌진 장군이 청산리 대첩에서 승리를 이끄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나, 이후 일본의 한인 학살을 지켜보며 충격을 받은 선생은 1023년 11월 본사 수도실에서 순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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