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시작된다는 입동이 왔다. 그래서 그런지 쌀쌀한 느낌이 드는 바람이 분다. 나뭇잎도 하나 둘씩 떨어지고 있다. 운동을 하며 누워 하늘을 보면 구름 한 점 없는 겨울 하늘이 선명하다. 나뭇잎 사이로 보이는 까치집도 겨울을 준비하는 듯하다.까치 부부가 집을 보수하는지, 한 녀석은 계속 나뭇가지를 물어오고, 다른 한 녀석은 그 가지를 정성껏 쌓고 있다. 흡사 인간의 부부 생활을 연상케 하는 그들의 겨울나기 준비인가 보다.아내가 동치미를 담는다고 부산하다. 옛날보다는 작은 무를 깨끗하게 닦고 배와 실파를 한 주먹씩 실로 감아 놓고 소
아무리 찾아도 없다. 들고 다니다가 어느 곳에 둔 것 같지도 않다. 지금껏 무엇을 가지고 다니다가 잃어버리거나 한 적이 없는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모를 일이다.남에게는 하찮은 것이 될 수도 있겠으나 나에게는 무척 귀하고 요긴하게 쓰이는 물건 중 하나이기에 더욱 애착이 느껴진다.지금 찾고 있는 등산스틱은 딸아이가 대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있는 작은 회사에 취업해 첫 월급을 탔다며 사가지고 온 선물이다. 평소 산을 자주 다니면서도 등산스틱을 가지고 다니지 않는 아빠에게 제일 필요할 것 같아서 사왔으니 꼭 사용하라는 말도 덧붙였다.스틱은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한다.” 어느 광고에 나오는 말이다.순간의 선택? 정말 중요한 것 같다. 하지만 그 순간의 선택을 잘못해서 10년이 아닌 일평생을 잘못 살아가는 사람도 있고, 또 순간의 선택을 올바르게 해 남에게 존경과 찬사를 함께 받는 경우도 있다.나는 매월 중순께가 되면 관리하고 있는 건물의 관리비 징수작업을 해야 된다. 수도와 전기 검침한 결과와 각종 공과금고지서 내역을 입력하고 고지서를 만들어 입점자에게 배부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한 동안 쓰지 않던 엑셀이어서 고전도 했지만 지금은 프로그램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마이크를 잡고 있는 여인의 모습이 정갈하다. 품위도 있어 보인다. 검은색과 은색이 적당하게 섞인 머리카락, 일부러 염색한 것 같지는 않고 자연스럽다. 달리는 버스 안에서의 진행도 매끄럽다.젊어서는 남부럽잖은 머리숱이었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자고 나면 빠지는 데에야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형님이나 동생은 머리숱이 많은 편이고 지금도 변함이 없지만 나만 유독 머리숱이 빠진 이유를 모르겠다.한때는 가발을 쓰고 다닐까도 생각해봤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에 그만두었다. 못생긴 얼굴에 가발 뒤집어씌운다고 미남이 될 리
따뜻한 보훈이란 무엇일까. 따뜻한 보훈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고, 평소 업무를 하면서 자주 접하는 단어지만 그 의미를 깊게 생각해볼 기회는 별로 없었던 것 같다. 그러다 무심코 떠오른 날이 있다.국가유공자 어르신들을 모시고 봄맞이 목욕나들이 행사를 갔던 날이었다. 목욕을 마치신 한 어르신께서 옷매무새를 만지신 후 소지품을 살펴보셨다. 그 분이 지갑에서 낡은 흑백사진 한 장을 꺼내셨다. 열일곱이나 열여덟쯤 되었을까, 까까머리에 볼이 통통한 소년, 어르신의 소싯적 모습이리라.어르신은 별 말씀이 없었지만, 전쟁이 끝난 후 수십 년의 지나
나의 고향 창원에는 산이 하나 있고 산 정상에 장방형의 큰 바위가 앉아 있었다. 고을의 어디에서 보아도 장롱만큼 크게 보여 예부터 농바위라 부르고 그 산을 농바위산이라 불렀다. 산에 나무가 많지 않던 그때에는 시야가 트여 먼 들판 길에서 보아도 환히 보였다.해가 농바위산 위에서 각을 이루면 중참을 먹었고, 농바위산에서 산그늘이 내려오면 우리네 어머니들은 저녁을 준비하셨다. 시계가 흔치 않던 그 시절, 시계처럼 마을 사람들의 생활에 말없이 도움을 주었던 농바위였다.등하교 길은 비포장 도로였고, 신발도 허술해 돌부리에 채이거나 넘어져
어떤 선은 길이 되고어떤 선은 집이 되어시공을 초월하여…바람이 솔솔 부는 날은 산길을 걷는다. 솔내음 풍기는 숲길을 걸어가며 새소리와 계곡의 물소리를 들으면 실타래 같은 삶의 일들이 술술 풀려 나감을 느낀다. 숲은 언제나 자신을 낮추어 다정하게 맞아주며 고향의 향수와 같은 정(情)과 그리움을 안겨준다.언덕을 오르며 흘리는 땀만큼 등성이에 올라서면 성취감은 배가 된다. 산 위에서 무성하게 우거진 푸른 능선과 그 아래의 도시를 바라보며 하나 둘 생각한다.그 해 여름 전장의 밀림에서 추위와 싸웠던 기억이 살아난다. 그날 부대
잊었던 낱말들이가까이 오고 있다사랑 용서 화해 이해아름답고 저린 언어들그때는 한발 멀리서바라보고만 있었지위로가 되고 싶다흘러간 시간 만큼아쉽고 부족하고몰라서 부끄럽던 일한 방울 눈물이 되어그대 위로 되고 싶다정표년(시조시인)
철없던 유년 시절에는 진달래꽃을 씻지도 않고 그냥 먹었다. 앞동산을 뛰어 놀던 때라 아무리 먹어도 배가 고팠다. 하얀 꽃향기가 황홀하였던 키 큰 아카시아 꽃도 따 먹었다. 벌들이 아카시아 꽃잎에 앉아 윙윙 거려도 겁 없이 한 웅큼씩 따서 먹었다. 철이 없으니 겁도 없었다. 꽃잎이 얇은 진달래 보다 꽃잎이 두툼한 아카시아 꽃은 먹으면 배가 불렀다.그런데 이 꽃은 먹고 나면 배가 아프기도 했다. 그래도 뛰어 놀다보면 아팠던 배가 말짱해 졌다. 요즘 아이들에게 진달래나 아카시아 꽃을 먹어보라 하면 ‘왜 그런 걸 먹어야 하느냐'며
어머니가 떠나시는 것을 예감했을까. 어머니가 가시던 날, 매화나무에는 붉은 꽃망울이 눈물방울처럼 매달려있었다. 터질 듯한 꽃망울로 어머니를 배웅하던 매화나무에 연녹색의 잎새가 무성한 것을 보니 생을 이끄는 것은 시간인 것 같다.어머니는 잔정 없고 무뚝뚝하던 아버님이 떠나신 후 몇 년은 사람 사는 것처럼 사셨다. 구질구질하던 젊은 날에 보상이라도 해주듯 시장에 가서 연분홍색 스웨터도 사고 몸빼 아닌 정장 바지도 사들였다. 박꽃처럼 하얀 얼굴에 크림을 찍어 바르고 연분홍색 립스틱으로 꽃잎 같은 입술을 그리기도 했다.그러나 호사를 누려보
옷을 벗기도 전에 곰보빵을 한 개 들고 앉았다. 나는 곰보빵을 먹어도 겉에 있는 울퉁불퉁하고 바삭한 곰보를 좋아한다. 순식간에 곰보빵 한 개를 먹어치우고 두 개째 집어 드는데 울룩불룩한 곰보빵 위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명희의 얼굴이 아른거린다. 명희는 아직도 곰보빵을 싫어할까?명희는 이웃에 살던 중학교 동창이다. 단짝 친구였던 명희와 같이 플라타너스 아래 앉아 곰보빵을 한 입 베어 무는데 갑자기 그녀의 팔이 번쩍 들렸다. 입에 대지도 않은 빵을 학교 뒤 담 너머로 던지는 것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명희가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순백의 화사한 벚꽃꽃잎이 물결처럼 일렁인다너울거리는 꽃을 맞는데그 위에 친정어머니 얼굴아른거린다다시 봄이다. 순백의 화사하고 고운 벚꽃이 눈부셔 현기증이 날 것 같다. 바람이 살랑일 때마다 하얀 꽃잎이 물결처럼 일렁인다. 너울거리며 날리는 하얀 꽃을 맞으며 걷는데 꽃잎 위에 돌아가신 친정어머니 얼굴이 아른거린다.꽃을 좋아하는 어머니 때문에 친정집은 꽃집 같았다. 봄을 맞는 친정집은 화초를 정성스럽게 돌보는 어머니의 손길로 해마다 꽃 대궐이었다.어머니가 안 계셔도 봄은 오고 꽃은 핀다. 미호천 둑을 따라 발을 떼는데 꽃이 진 자리에
우리는 파도를 별개로 일어나고 밀려오는 것으로 착각한다. 파도는 언제나 바다 위에서만 일어나고 있음을 깨우치고 알아야 한다.태어남이 없으면 삶도 없고 세상도 없듯이 행복과 불행도 없다.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난 것에 대해 무한한 감사와 함께 운 좋게 덤으로 세상을 구경할 수 있음에 기뻐해야 한다.파도가 아무리 거세게 밀려와도 파도는 바다 위에서 일어난다. 바다가 없다면 파도도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삶도 태어나고 살아있을 때 세상사의 모든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다. 세상을 떠나면 삶이란 없다, 바다를 떠나면 파도는 일지 않는
아침이 즐거운 사람은 저녁이 행복하다. 저녁이 행복한 사람은 내일이 즐겁다. 내일이 즐거운 사람은 평생이 행복하다. 삶이란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고, 삶은 현실이다.공자나 맹자도 고비고비 고뇌의 삶을 겪어 왔다는 것은 역사가 말해주고 있다. 이 세상 그 누가 즐겁고 행복하게 살고 싶지 않겠는가? 마음대로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인생사일 것이다. 어쩌면 삶이란 고통의 연속일 수도 있다.지금 이 시간에도 마지막 남은 1분 1초와 운명의 사선에서 삶과 분투하는 생명이 있는가 하면, 내일의 성공과 행복을 위해 이른 새벽부터 현장에서 또는
월요일 아침 일찍 오랜만에 아내와 기차여행으로 1박 2일 강원도 곰배령을 가기 위해 해운대에서 무궁화호 기차를 탔다.어릴 때야 자연과 사람에 대한 깊은 생각과 살아온 경륜이 짧으니 그저 눈에 보이는 것만 의미가 있고, 그 이상의 것은 볼 수도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조금 달라졌다. 우주 만상의 하나하나가 나의 눈에 꼭 들어오는 것은 물론 흘러가는 구름과 바람, 산과 들에 핀 이름 모를 꽃들까지 나를 감탄케 한다. 모든 것이 신비롭고 아름답다. 어쩌면 여행을 많이 안 해본 탓에 든 생각, 혹은 나이가 들었기 때문에 든 생각일지 모르겠
카자흐스탄에 들어 온지 이틀이 지났는데 아직도 비행기 소리가 내 머리 속을 울리며 환청을 일으키고 있다. 목욕탕에 가서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면 피로도 풀리고 정신도 상쾌해 질 것 같아 공중목욕탕을 찾았다. 입장료를 내고 표를 한 장 받아 들고 2층으로 올라갔다.그런데, 옷을 벗고 있는데 뜻밖에도 키가 훤칠한 미모의 여성이 타월을 손에 받쳐 들고 내 앞으로 다가온다. ‘아니, 여탕에 잘 못 들어왔나’ 깜짝 놀라 주춤거리는데 그는 살짝 미소를 띠우며 타월을 한 장 주고는 다소곳이 서 있다. 분명 남자탈의실로 알고 들어왔는데 여인이라니
가을이 시작된다고 하는 입추가 지났는데도 불볕더위는 식을 줄 모르고 계속되고 있다. 열대야로 밤잠을 설치고 새벽녘 잠을 좀 붙이려고 누웠는데 요란한 매미소리에 잠을 잘 수가 없다. 바로 머리맡 창문 방충망에 참매미 한 마리가 붙어 옥타브를 한껏 높여가며 귀가 따가울 정도로 울어댄다. ‘굼벵이로 7년이라는 긴 세월을 인내하며 준비해 온 위대한(?) 생명체가 쏟아내는 저 소리에 필시 사연이 있지 않을까. 그 사연을 자기의 온 힘을 다해 소리로 표현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나도 모르게 매미의 울음소리를 감상하고 있었다.
‘목욕’ 하면 내 젊은 시절 군 야전병원에서 본 상황이 머리에 떠오른다.월남전에 파병되어 맹호부대 복무 중 야전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은 적이 있었다. 이틀 후면 퇴원을 해 소속 부대에 복귀를 앞두고 있을 때다. 잠이 막 들려고 하는 야밤중에 요란한 총소리에 놀라 밖으로 뛰쳐나왔다. 조명탄이 하늘에서 터지면서 순간 대낮처럼 밝아지고 비상이 걸렸다. 헬리콥터 한 대가 병원 승강장에 내려앉았다. 두 명의 사상자가 헬리콥터에서 실려 나온다. 부상자는 응급실로 실려 가고 사망자는 영현소대로 옮겨졌다.침대에 누웠으나 잠이 오지 않아 다시 일
‘꽃집의 아가씨는 예뻐요. 그렇게 예쁠 수가 없어요.’ 이런 노래 가사가 있다. 꽃은 보면 볼수록 예쁘고 향기 좋고 빛깔마저 곱다. 나는 십 오륙 년 동안 꽃집을 운영하며 내 등에 짊어지지도 못할 만큼의 많은 꽃을 손님들께 선물했다.나는 수천, 수만 송이의 카네이션을 이 세상 어버이들 가슴에 달아줬고, 향긋한 프리지아로 졸업식과 입학식을 축하했으며, 화사한 장미는 결혼기념일, 생일 등 사람들의 모든 행복한 날을 함께 했다. 내가 건네는 꽃을 받으며 항상 고맙다는 인사와 흐뭇한 미소로 돌아서는 손님들의 뒷모습을 보며 삶의 보람도 찾았
햇살이 따사롭고 아지랑이 아물아물 맴돌며 하늘 향해 날던 어느 날 앵두나무 곁에 가보니 가지가지마다 빨간 앵두가 촘촘히 열려 있었다. 작은 나무 한그루라도 이렇게 가지가 보이지 않도록 앵두가 빽빽하게 열리는 것이 기특하기도 하고 모양도 예뻐 마음은 흐뭇하고 얼굴엔 저절로 함박웃음이 지어졌다.봄이 찾아오는지 어찌 알고 때 맞춰 주렁주렁 달린 앵두처럼 우리 집에도 자랑거리가 한가득 많은데, 그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어릴 적 나의 아버지는 항상 병석에 누워계셨다. 어린 나는 왜 아버지는 항상 아프실까 궁금했다. 말귀를 알아듣고 철이 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