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크를 잡고 있는 여인의 모습이 정갈하다. 품위도 있어 보인다. 검은색과 은색이 적당하게 섞인 머리카락, 일부러 염색한 것 같지는 않고 자연스럽다. 달리는 버스 안에서의 진행도 매끄럽다.

젊어서는 남부럽잖은 머리숱이었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자고 나면 빠지는 데에야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형님이나 동생은 머리숱이 많은 편이고 지금도 변함이 없지만 나만 유독 머리숱이 빠진 이유를 모르겠다.

한때는 가발을 쓰고 다닐까도 생각해봤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에 그만두었다. 못생긴 얼굴에 가발 뒤집어씌운다고 미남이 될 리 없다는 생각에서다.

직장에서 퇴직한 지 10여 년이 지났다. 남들은 그동안 열심히 일했으니 이제 좀 편히 쉬라고 하지만, 나에게 일이 없다는 것은 곧 사지(四肢)가 묶이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생각에 끊임없이 일을 찾아다녔다.

그런 나를 보고 어떤 이는 나이 보다 덜 들어 보인다고 하는 데 그게 다 모자를 쓴 덕분일 거다. 모자 벗은 내 머리를 보면 역시 나이는 못 속이는구나 하며 고개를 끄덕일 거다.

지난해 12월 옛 직장 상사가 빌딩관리소장 자리가 나는데 한번 해보지 않겠느냐고 했다. 직장에 컴퓨터 보급될 때 어렵게 배워 업무에 응용하는 것을 상사는 기억하고 있었나보다. 엑셀도 간단한 예산 같은 것은 다루었으니 수도·전기 검침하고 고지서 내보는 것은 조금만 노력하면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추천한다는 거였다.

어렵게 찾아온 행운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 한다? 우선 머리 염색부터 하고, 양복을 말끔하게 입고 구두도 광을 내고, 아니면 지금처럼 모자를 깊숙이 눌러쓰고 걸음걸이도 젊은이들처럼 빠르고 당당하게 걷고….

옛 상사와 함께 빌딩관리사무소에 인사하러 가기로 한 날이었다. 면접을 보는 거나 같은 격이었다고 하면 맞을 것 같다. 전날 목욕탕에 가서 염색을 했다. 아내가 양복을 꺼내놓고 내 눈치를 살핀다. 언제 입어봤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내놓았던 양복을 다시 옷장에 걸어놓고 평소 습관 그대로 겨울 바지에 점퍼를 입고 모자를 썼다. 지금까지 자랑스러운 삶은 아니었어도 열심히 살아왔다고 자부한다. 그러니 앞으로도 가식 없이 당당하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모자를 벗어 못에 걸었다.

그리고 거울을 들여다보니 온화하게 생긴 중년이 한참 지난 사내가 나를 향해 씩 웃으며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 같았다.

“이제 철들었네!”

박순철 1949년 충북 괴산 출생. 월간 ‘수필문학’으로 등단, 수필과 콩트를 써오고 있다. 수필집 ‘달팽이의 외출’‘예일대 친구’를 냈다. 형제가 월남전에 참전한 국가유공자 가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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