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선은 길이 되고

어떤 선은 집이 되어

시공을 초월하여…

바람이 솔솔 부는 날은 산길을 걷는다. 솔내음 풍기는 숲길을 걸어가며 새소리와 계곡의 물소리를 들으면 실타래 같은 삶의 일들이 술술 풀려 나감을 느낀다. 숲은 언제나 자신을 낮추어 다정하게 맞아주며 고향의 향수와 같은 정(情)과 그리움을 안겨준다.

언덕을 오르며 흘리는 땀만큼 등성이에 올라서면 성취감은 배가 된다. 산 위에서 무성하게 우거진 푸른 능선과 그 아래의 도시를 바라보며 하나 둘 생각한다.

그 해 여름 전장의 밀림에서 추위와 싸웠던 기억이 살아난다. 그날 부대를 떠나 1번 도로 따라 이동하면서 부터 비가 내렸다. 진지를 완료하고 석식을 취한 후에도 비는 줄기차게 내렸다.

옷과 몸이 젖은 상태라 밤이 되니 손발이 시려오고 턱이 덜덜 떨렸다. 소대원들도 춥기는 마찬가지여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엄습해 오는 어둠과 추위에 소대장인 내가 춥다고 움츠리면 안 되는 일이기에, 그렇다고 전장에서 소리를 내어서도 안 되는 일이라 사주경계에 임한 대원을 제외 하곤 각자의 위치에서 제자리 뛰기를 하였다.

다행히 뛰면서 나는 소리들은, 활엽수에 부딪치는 빗방울 소리에 묻혀 외부로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뛰고 나니 추위가 조금씩 사라지고, 손가락에 따뜻한 감각이 찾아왔다. 이렇게 생생한 기억이라니.

산 위에서 도시를 내려다보며 다시 생각에 잠긴다. 도시는 한시도 쉬지 않고 빠르게 움직이며 온통 선으로 이어져 있다.

거미줄처럼 오밀 조밀 하다가 바둑판처럼 반듯 반듯 하다가 옆으로 동심원을 그리며 뻗어 나가고 있다. 어떤 선은 길이 되고 어떤 선은 집이 되어 시공을 초월하여 나아가고 있다.

도시는 선 위에서

어떤 선은 그어 길이 되고

어떤 선은 그려 집이 되고

누군가의 선은 그림 이었고

누군가의 선은 시(詩) 이었다

시공도 선으로 이어져

대지를 그리고 도시를 낳는다

도시는 선으로 산다

길따라 울고 웃는 인생선

섭섭한 루빈의 선

인생도 선위에 산다

(나의 졸시 ‘도시는 선으로 산다')

이성문 경남 창원 출생. 국가유공자이며 현재 부산지역 시인협회 회원으로 창작활동을 하고 있다. 시집으로 ‘바람 불어 피는 풀꽃’ ‘오작교를 그리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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