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없던 유년 시절에는 진달래꽃을 씻지도 않고 그냥 먹었다. 앞동산을 뛰어 놀던 때라 아무리 먹어도 배가 고팠다. 하얀 꽃향기가 황홀하였던 키 큰 아카시아 꽃도 따 먹었다. 벌들이 아카시아 꽃잎에 앉아 윙윙 거려도 겁 없이 한 웅큼씩 따서 먹었다. 철이 없으니 겁도 없었다. 꽃잎이 얇은 진달래 보다 꽃잎이 두툼한 아카시아 꽃은 먹으면 배가 불렀다.

그런데 이 꽃은 먹고 나면 배가 아프기도 했다. 그래도 뛰어 놀다보면 아팠던 배가 말짱해 졌다. 요즘 아이들에게 진달래나 아카시아 꽃을 먹어보라 하면 ‘왜 그런 걸 먹어야 하느냐'며 눈을 부릅뜨고 항의할 것이다. 그렇게 오랜 기간이 아닌 사이에 우리의 사랑도 우리의 풍속도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힘들고 어려운 고비를 맞을 때가 있다. 삶이 그런 고비를 맞을 때 절망하지 않고 그 늪을 헤쳐 나가는 슬기가 진짜 용기다. 잘 가다가도 고난에 처해지면 남들은 쉽게 비웃고 등을 돌리는 게 세태다. 그런 와중에도 변함없이 믿어주고 위로해 주는 친구도 있다. 말은 쉬워도 실천하는 이는 하늘에 별 따기 만큼이나 귀중하다.

그 유명한 세한도(歲寒圖)의 사연이 그렇다. 추사 김정희는 영조의 부마였던 조부의 사랑 아래 남부럽지 않은 환경에서 자라며 서화에 뛰어난 천재성으로 명망이 높았음에도 당시의 극심한 세도정치에 밀려 제주도 유배 생활을 하였다.

반대파의 박해도 심하여 벗들도 하나 둘 떠나가고 사랑한 아내마저 영원히 이별한 쓸쓸하고 추운 유배 시절에 그를 처음처럼 변함없이 믿어주고 도와준 우선 이상적이 있다. 그는 청나라에서 어렵게 구입한 서적들을 세간의 소식과 함께 적어 김정희에게 보내었다. 그렇게 보낸 책이 한 두 권이 아니고 경세문편 120권 등 모두 귀한 서적들이었다. 다들 곁을 떠나고 아무 힘도 없는 자신에게 끝까지 믿음을 주는 이상적이 너무 고마워서 눈물 지은 영감으로 그린 그림이 세한도라 하지 않는가.

장무상망(長毋相忘) 인장을 찍어 편지와 함께 이상적에게 보내어졌고 이후 이 그림은 중국과 일본을 오가며 사람의 손과 마음을 거쳐 책이 몇 권이 되어도 모자랄 사연을 함께 담고 있다.

필부의 체험에서나 명사들의 생활에서나 중요한건 믿음이었다. 어디에도 어느 때도 만만하지 않은 삶의 강을 나를 믿듯이 너를 믿고 오늘처럼 내일을 믿어 건너가보자. 앞서간 임들이 잠들어 있는 6월 하늘을 우러러 보며 나에게 다짐을 한다.

이성문 경남 창원 출생. 국가유공자이며 현재 부산지역 시인협회 회원으로 창작활동을 하고 있다. 시집으로 ‘바람 불어 피는 풀꽃’ ‘오작교를 그리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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