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자흐스탄에 들어 온지 이틀이 지났는데 아직도 비행기 소리가 내 머리 속을 울리며 환청을 일으키고 있다. 목욕탕에 가서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면 피로도 풀리고 정신도 상쾌해 질 것 같아 공중목욕탕을 찾았다. 입장료를 내고 표를 한 장 받아 들고 2층으로 올라갔다.

그런데, 옷을 벗고 있는데 뜻밖에도 키가 훤칠한 미모의 여성이 타월을 손에 받쳐 들고 내 앞으로 다가온다. ‘아니, 여탕에 잘 못 들어왔나’ 깜짝 놀라 주춤거리는데 그는 살짝 미소를 띠우며 타월을 한 장 주고는 다소곳이 서 있다. 분명 남자탈의실로 알고 들어왔는데 여인이라니. 순간적으로 별별 생각이 머릿속을 어지럽힌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망설이고 있는데 출입문이 열리며 장정 세 명이 들어온다. 옷을 훌훌 벗어 옷장 속에 던져 넣자 서 있던 여인이 다시 다가가 타월을 건네주고는 열쇠로 옷장 문을 잠근다. 아하! 이제야 알겠다. 이 여자가 남자탈의실을 관리하는 직원이구나. 내가 돌아서서 벗은 옷을 옷장에 넣자 그는 다가와 옷장 문을 잠근다.

여인이 준 타월을 들고 홀 안으로 들어섰다. 넓은 홀 안에는 몇 몇 남자들이 벌거벗은 알몸으로 열기를 식히며 의자에 앉아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저쪽에는 누워있는 사람도 보인다. 한 남자가 옷장 앞으로 다가서자 그 여직원이 열쇠를 가지고 달려가 옷장 문을 열어준다. 놀랍게도 그는 남자들의 알몸 앞에서 아무 거리낌 없이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으며, 남자들은 여인 앞에서 태연히 행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유교문화권에서 살아온 내게 이 나라에 와서 만난 첫 번째 문화충격을 삭이며 욕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이건 또 무슨 광경인가? 남자들이 벌거벗고 목욕하는 욕실 안에 긴 치마 입은 여자가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들고 청소를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이거야 원, 민망하고 쑥스러워서 어디 목욕 하겠나’ 하는 생각이 잠시 머리를 스쳐간다.

그러나 나는 곧 ‘에라, 모르겠다. 이왕에 들어왔으니 내 볼일 봐야겠다’ 하며 대야에 물을 받아 전신에 물을 끼얹어 수분을 공급하는 것으로 목욕을 시작했다. 이곳 목욕탕은 한국과 달리 물을 받아 놓는 욕조가 없고 온수파이프와 냉수파이프를 틀어 적절히 온도를 맞추어 각자 대야에 물을 받아쓰도록 되어있다. 그리고 천정에 온수와 냉수파이프가 각각 한 개 씩 있어서 그 파이프 아래 가서 전신 샤워를 할 수 있고, 욕실 옆에 찜질방이 붙어 있어 그 곳에 들어가 맘껏 땀을 흘릴 수가 있다.

파이프 아래에는 알몸 여러 명이 자기 차례를 기다리고 서 있다. 불평하거나 짜증내지 않고 나이 든 어른에게는 순서를 양보하면서 질서를 지키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이 나라의 목욕문화가 꽤 재미있다는 생각을 하며 상쾌한 마음으로 목욕탕을 나왔다. 오늘 본 목욕탕 풍경을 그림으로 그려보면 어떨까 하는 생뚱맞은 생각을 해 본다. 유화로 그릴까? 아니지, 수채화가 좋을 거야. 작품 제목은? 그저 평범하게 ‘카작 욕탕의 수채화’ 정도. 명작은 못 되어도 걸작은 되지 않을까 싶다.

 

김정복 국가유공자로 교직을 명예퇴직하고 해외에서 15년 간 우리글과 우리문화를 전파하는 자원봉사활동을 했다. 현재 청주에서 독서와 글쓰기에 힘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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