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이 따사롭고 아지랑이 아물아물 맴돌며 하늘 향해 날던 어느 날 앵두나무 곁에 가보니 가지가지마다 빨간 앵두가 촘촘히 열려 있었다. 작은 나무 한그루라도 이렇게 가지가 보이지 않도록 앵두가 빽빽하게 열리는 것이 기특하기도 하고 모양도 예뻐 마음은 흐뭇하고 얼굴엔 저절로 함박웃음이 지어졌다.

봄이 찾아오는지 어찌 알고 때 맞춰 주렁주렁 달린 앵두처럼 우리 집에도 자랑거리가 한가득 많은데, 그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어릴 적 나의 아버지는 항상 병석에 누워계셨다. 어린 나는 왜 아버지는 항상 아프실까 궁금했다. 말귀를 알아듣고 철이 들 무렵부터 아버지는 자식들을 옆에 앉혀놓고 아버지의 젊은 시절 이야기를 광주리에서 감자를 꺼내주듯 하나씩 하나씩 풀어내셨다.

아버지는 4살 때 죽은 형님의 호적에 대신 올라가 본디 나이보다 4살이나 많게 사셨다. 아버지가 실제 나이 18세가 됐을 때 6·25전쟁이 터졌는데 서류상 22세 청년이었던 아버지는 고등학생 나이에 국군으로 참전하게 됐다고 한다. 나이가 많든 적든 전쟁의 참혹함은 누구도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겠지만, 아버지는 특히나 주린 배를 참지 못하던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하셨다.

아버지는 깊은 산 속에서, 굴속에서 얼마의 낮과 밤이 지나갔는지도 모를 만큼 긴 시간을 낮에는 총을 겨누고, 밤에는 어둠 속에서 전우의 어깨에 기대 지냈다. 수북이 내린 눈이 얼어붙어도 그 위에 모포 한 장 깔고 이루지 못하는 잠을 청했다. 산 아래에서 지게에 주먹밥을 지고 올라오던 병사가 총에 맞으면 그나마 먹던 언 밥도 먹지 못해 어리디 어렸던 우리 아버지들이 굶주려 갔다.

전쟁 난리통에 살아남은 아버지는 고향에서 헤어졌던 친구를 만나 얼싸안고 “너하고 나하고 의형제 되어 우애 갖고 영원히 함께 살자”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셨단다. 아버지께 전해들은 전쟁의 참상은 내 마음 속에 깊이 새겨져 내가 겪은 것 마냥 아프고 슬펐다.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 왜 서로를 희생해야 하는지 아직도 그 답을 찾을 수가 없다.

아버지의 전쟁 이야기를 들으며 컸던 내가 결혼을 하고 보니 6·25전쟁의 흔적은 다시 시아버님을 통해 다가왔다. 시아버님의 왼쪽 배에는 20센티미터가 넘는 수술자국이 남아 있다. 전쟁 당시 총에 관통상을 입었던 흉터라고 한다. 산 속에서 북한군을 피하다가 총상을 입은 시아버님은 죽을 고비를 넘기고 국군임시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중 전쟁이 끝났다. 시아버님은 그때의 상처로 지금까지 평생을 고생하며 사신다.

나와 인연을 맺은 두 분의 아버지가 아름다운 이 나라, 이 강토를 지키기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쳤다는 사실이 다시 자랑스럽고 감사하다. 나는 나와 내 자식들이 발 뻗고 편안하게 자고, 먹고, 공부할 수 있는 나라를 물려주기 위해 피 흘리고 목숨 바쳐 희생한 두 아버지를 마음 깊이 존경한다.

전쟁이 일어난 1950년 6월 25일부터 휴전한 1953년 7월 27일까지 1,129일이라는 기나긴 날 동안 조국을 위해 이름 없이, 빛도 없이 희생한 모든 아버지와 어머니께도 감사 인사드린다. 감사드립니다. 오늘 우리 모두가 고개 숙여 감사 인사드립니다.

 

김수영 전북 익산에서 꽃집을 운영하고 있다. 참전유공자인 친정아버지와 시아버지 두 분을 모시면서 나라사랑에 대한 활발한 글쓰기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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