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자에게는 세 가지 즐거움이 있다.첫째로 부모님이 아직 건강하게 살아계신다면 즐거움 중에 으뜸이라 여길 수 있다. 그러나 내 나이가 있기도 하거니와 지병으로 아버지와 어머니는 벌써 오래 전에 저세상으로 떠나셔서 난 천애고아가 됐다.이제는 천애지각으로 하늘 끝과 땅의 귀퉁이에 아득하게 멀리 떨어져 있음을 알았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부모님을 땅에 뉘어보지 않은 사람은 인생을 논할 가치가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장례 모시는 날 장지에서 남은 사람들은 ‘자 이제 마지막이니 흙을 한 삽 떠서 뿌리시오’ 하는 말을 듣는다. 세상에서 가장
지난 가을 시골 사는 먼 친척이 늙은 호박 한 덩이를 선물로 가져왔다. 작은 방에 그대로 있어서, 찹쌀가루 남겨둔 것이 생각나 죽을 쑤어볼 요량으로 몸통을 이리저리 굴려 살폈다. 겨울 동안 썩지는 않았을까 걱정이 되었다. 골이 진 곳에 허연 분이 퍼져 있지만 겉모양이나 빛깔로 보아 그대로인 것 같다. 하지만 배꼽 부분에서 손길이 멈췄다. 짓무른 듯한 상처가 만져졌다. 물엿 같은 물방울이 서너 군데 맺혀 있어 손톱으로 눌러 보니 물컹한 느낌이 손끝에 와 닿는다.행주질을 말끔히 하여 칼로 반을 쭉 갈라 보았다. 맛깔스런 노란색과 단 냄
포근한 눈송이가 마음 속을 가득 채운다. 그 해 겨울은 유난히 눈이 많이 왔다. 어린 시절 붕어빵의 이야기는 아련한 추억으로 정감을 더해준다. 가난한 시절, 시골은 낭만보다는 결핍의 자존감이었다. 겨울나무가 지키고 있는 바람의 언덕, 고향의 향수가 간절하게 그리운 계절이다.세월의 더께만큼 소중했던 추억도 희미해진다. 살아온 흔적들이 신선한 바람이 되어 가슴이 아리다. 초등학교 시절 남동생과 나는 배고픔을 참고 산언저리에서 어머니를 기다렸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가장이 되어 늦게까지 일을 하셨다. 어머니가 와야 저녁을 먹을
고요히 깊어 가는 밤이다. 외로움 속에 그리움을 꿈꾸어 본다. 어머니의 정성이 담긴 잔치국수와 적당히 익은 김치를 머리만 베어 손으로 쭉쭉 찢어서 서로 많이 먹겠다고 다투던 시절, 함께 먹었던 부모 형제가 보고 싶다.김장철이 되면 어머니는 겨울동안 먹을 김치를 담그기 위해 며칠 전부터 준비를 했다. 배추김치, 총각김치, 동치미는 빠지지 않고 담그신다. 그 중에 제일 신경써서 담는 것은 동치미다. 사람이 들어갈 정도의 큰 항아리에다 담는다. 아버지는 독을 묻기 위해 땀을 흘리시며 땅을 파신다. 겨울 양식이라 하시며 여름부터 정성들여
소슬바람이 분다. 섬돌 밑에서 밤을 새워 가며 안타까이 울어대는 귀뚜라미 소리가 구슬프게 들린다. 바람이 문풍지를 울릴 때마다 우수수 떨어진 낙엽 소리에 달빛이 서럽게 흐른다. 애달픈 닭 울음소리는 그리움과 회한의 눈물이 내 야윈 가슴팍을 치며 왈칵 밀려온다.야트막한 야산 초입, 산기슭에 아담한 단독주택에 딸은 서울에서 춘천으로 아들 교육을 위해 이사를 했다. 도시에서 누릴 수 없는 여유 속에 텃밭에다 채소도 심었다. 병아리를 가족으로 오골계, 청계를 20마리 사서 방 안에서 함께 살았다. 추워서 얼어 죽을까봐 방에서 함께 지낸다고
우리들은 진정으로 이와 같은 죽음과 소멸의 길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일까요.우리들의 육신은 태어났다가 죽는다고 합니다. 그러면 왜 육신은 태어났다가 죽는 것일까요. 그것은 태어나는 것은 좋아하고, 죽는 것은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이 없다면 태어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습니다. 과학은 육신의 근본이 되는 물질이 무엇인지 아직까지도 모르고 있습니다. 육신의 근본이 무엇인지 모르는 우리들이 ‘육신은 태어나고 죽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어리석음의 비약일 뿐입니다.우리들의 육신은 본래 태어나고 죽는 것이 아닙니다. 왜
어머니 등에 업혀 시골집을 떠나 늦은 오후에 도착한 곳은 6·25전쟁 발발 후 추가 징집된 장병들의 집결지, 전쟁터로 떠나는 남편이나 아들을 한번이라도 더 만나려고 먼 길을 찾아온 가족들로 붐볐다. 많은 징집자 속에서 남편을 찾아 헤매던 어머니가 다급히 쫓아가는 쪽에는 아버지가 눈물을 훔치던 손을 차창 밖으로 내젓고 있었다. 잠시 후 차는 움직이기 시작했고 나도 어머니를 따라 울면서 고사리 손을 흔들어 주었으나 아버지 모습은 점점 멀어져 갔다.몇 개월 후에 먼저 입대한 외삼촌의 군사우편을 통해 “아버지는 중부 전선으로 투입되었다”라
저는 지난 어느 날 한 권의 책을 보던 중 글자가 없는 하얀 공간에 마침표와 같은 까만 점을 우연히 보고, ‘이것이 무엇인가’하고 무의식 중에 손가락으로 가만히 누르려 하자, 까만 점이 그만 조용히 날아가는 것을 보고 무척 놀란 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세상에서 자신의 생명과 목숨을 그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고 아끼는 것처럼 제아무리 작고 보잘 것 없는 벌레일지라도 자기의 생명과 목숨은 소중하고 아까운 것입니다.인간은 자신의 생명을 보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육신의 보신과 쾌락을 위해 남을 죽음의 고통으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이 우주
우리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장 많은 의문과 질문이 있다면 아마도 나와 너는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우리들의 운명은 정해진 것인가, 운명은 개척해 바꿀 수 있으며 소원은 이루어질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일 것입니다.과학은 150억 년 전 하나의 티끌이 대폭발(빅뱅)해 오늘의 우주세계가 생겼고 우리들이 생긴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과학은 하나의 티끌이 빅뱅하기 전에는 무엇이 있었으며, 빅뱅 당시 하나의 티끌이 무엇인지는 지금도 모르고 있습니다.그래서 과학은 티끌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티끌 하나를 분해해 들어가 보니 미세먼
며칠간 낮동안 햇빛이 여름의 그것처럼 따사로워 서남 해역 작은 섬 추자도에서 근무하던 시절 선원 부족으로 쩔쩔매는 어민들의 멸치잡이에 도움을 주었던 기억이 떠올랐다.추자도는 예로부터 멸치잡이로 유명한 곳이다. 멸치잡이는 여름 한 철, 그것도 야간에만 이루어지기 때문에 퇴근해 저녁 식사를 마친 후, 바쁜 일손을 도우려 여유롭게 승선했다. 멸치잡이 일은 8명 이상이 팀워크를 이뤄 야 하므로 한 명이라도 부족하면 출어를 할 수 없다. 섬에 있는 젊은 사람들이 총 동원됐기에 멸치잡이 철이 되면 서툴기 이를 데 없는 나에게도 승선 요청이 왔
코로나가 절정기에 달했을 때 하루 700명이 넘는 확진자가 나왔다. 당시 대구는 물론이고 전국은 충격에 빠졌다. 대구 최대 중심가이자 번화가인 동성로에 인적이 끊어지고, 전국 3대 시장인 서문시장이 시장 개설 이래 최초로 일주일간 전체 휴점을 하고, 시민들은 공포 분위기 상태에서 집콕(집에 콕 박혀 나오지 않는 상태)을 시작했다.전국에서 의료진이 몰려오고 119구급대원들이 지원을 왔다. 코로나 대응 총력전이 시작되자 시민들은 자원해온 의료진이 잠이라도 편하게 잘 수 있도록 호텔이나 여관방을 통째로 내어주는가 하면 철저한 위생관리로
모범 경비원으로 선발되어 부상으로 현금 10만원을 받았다. 동료들과 국밥 한 그릇씩 나눠 먹고도 20kg짜리 쌀 한 포대를 살 돈이 남았다. 그 돈으로 쌀을 사서 무료급식소를 찾아갔다.아내가 급식을 나눠주시는 분께 점심 한 끼를 하는 데 쌀이 얼마나 필요하냐고 물으니 그분은 500명 정도니까 20kg짜리 쌀 여섯 포대가 필요하다고 하였다. 아내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이후 아내의 생일날이 다가오자 아내는 묻지도 말고 따지지도 말고 30만 원만 달라고 하였다. 모든 통장을 다 쥐고 가정 경제를 운영하는 아내다. 평소 헛돈 한 푼 쓰
내 고향인 김천시 증산면에는 옥동이라는 마을이 있다. 주소가 김천시라 얼핏 들으면 트인 곳 같지만 실은 지난날 금릉군으로, 시골 가운데서도 깊은 산골마을이다.어쩌다가 고향에 한 번씩 가게 되면 그 마을 앞을 지나게 된다. 이웃 마을이란 것만 아니면 다른 타향의 낯선 마을과도 하나 다를 게 없는 그런 마을 입구 이정표 옆에 조그만 비석하나가 서있다. 허리춤에 못 미치는 나지막한 크기인데 고향을 수시로 다니면서 그 앞을 여러 번 지나갔지만 거기에 그런 비석이 서 있는 걸 몰랐다. 올 봄 나는 친구들과 같이 그 마을 모퉁이를 걷다 처음으
“70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한시도 잊지 않고 있었습니다. 늦었지만 조국을 위해 헌신하신 선배님들을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6·25 70주년을 맞아 전쟁 당시 전사한 국군 장병 분들의 유해를 모신 수송기를 호위한 공군전투기 조종사의 말은 많은 이들의 마음을 뭉클하게 했다. 참전 장병들은 비록 70년이란 오랜 세월이 지나 조국으로 돌아오게 됐지만, 그들은 여전히 누군가의 가족이자, 친구, 자랑스러운 선배로 우리 기억 속에 영원히 남아있었음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서울지방보훈청에서 ‘사망시 예우' 업무를 담당하는 나에게는 무연고
나이 탓일까, 요즘은 지나온 날들을 돌아보며 추억을 뒤적거리며 보내는 시간이 잦다. 책장을 넘기듯 기억 속을 헤매다보면 이런 것, 저런 것들이 더러 나온다. 그 가운데는 잊고 싶은 것도 있지만 괜히 가슴을 울렁이게 하는 것도 있다.얼마 전에 집을 옮기면서 이삿짐을 꾸리다가 발견한 편지 한 장이 있는데 그것이 자꾸만 과거를 흔들어 깨운다. 이제는 까마득히 잊혀져 기억에서도 희미해지고 있는데 책갈피 속에서 나타난 것이다.편지만 몇 번 나누었지 아직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 그러면서도 10여년 가까이 마음 속에 두고 행복을 기원했던
대창양로원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오래 전의 일이다. 직장생활을 통신사에서 보내다 어느 해인가 십시일반으로 직원들이 연말 불우이웃돕기 모금을 했는데 그 가운데 일부를 대창양로원에 지원하게 됐다.그곳은 일제강점기에 사할린으로 강제 징용된 우리 동포들이 나라 잃은 설움과 강제 노동에 시달리다 정부의 주선으로 귀국해 지내는 곳이었다. 입주하신 분들은 대다수가 무의탁으로 연고가 없는 고령의 노인이었다. 내가 이곳을 찾게 된 것은 우연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대단한 인연이기도 하다.은퇴 후 어느 날, 문득 대창양로원의 사할린 교포 할아버지, 할
며칠 전 청계산에 가기 위해 지하철을 타고 양재역에서 내렸다. 예전에는 그렇게 붐비던 지하철역이 한산하기 이를 데 없었다. 코로나19가 덮친 역사는 사회적 거리두기의 여파인지 차량도, 통행하는 사람도 드물었다.양재역에서 지상으로 통하는 출구는 계단이 꽤 많아서 걸어 올라가다가 잠시 쉬었다 가야하는 곳이다. 그 길을 오르다 잠깐 예전 생각이 났다.지난 해 봄 이맘때던가 지인들과 청계산에 오르기로 약속을 잡고 그 때도 양재역에 내렸다. 출근시간이 막 지난 아침 9시 반쯤이었는데 오가는 사람들로 붐볐다.3번 출구 쪽 계단을 오르고 있을
새벽녘이면 가끔 속이 쓰려 병원에 갔더니 의사선생님이 위염증세가 있으니 커피나 탄산음료를 마시지 않는 게 좋겠다고 한다. 사이다나 콜라 같은 탄산음료야 별로 마시지 않으니 상관없지만 커피를 마시지 말라는 건 나에게서 즐거움 하나를 제하는 일이다.커피를 처음 만나건 60년대 말 베트남에서다. 당시 병사 개개인에게 지급된전투식량인 C레이션 안에는 커피며 설탕봉지와 크래커, 닭고기 등 통조림이 들어 있었다. 설탕은 단 것이니 그냥 먹었고 커피는 쓰디 쓴 게 ‘영 아니올시다’해서 뜯지도 않고 봉지 채 그냥 버렸다. 아마 나 뿐만이 아니라
즐겁게 살기로 마음먹은 사람은 하루 종일이 즐거움 투성이라고 한다. 나이가 많아도 할 수 있는 일거리가 있어야 한다.퇴직을 하면 그저 편하고 좋을 것처럼 생각했으나 실제 퇴직하고 시간을 보내니 지루하기만 하고, 친구들을 찾아가서 시간을 보내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계속 그럴 수가 없었다. 근무할 때는 보람도 있고 하루가 언제 지나갔는지 모를 정도로 시간이 빨리 흘렀다. 바쁘게 움직이다보면 점심을 못 먹는 일도 다반사였는데 말이다.예전에는 어르신들이 부자보다도 행복한 사람은 ‘바쁘게 일하는 사람’이라고들 하셨는데 퇴직하기 전에는 그 말
70대 아내를 국보처럼 대접을 해야 한다는 기사를 어느 신문에서 보고 피식 웃었다. 왜 국보처럼 대접해야 한다고 했을까? 보배로 아끼고 보존해야 하는 것이 국보인 것을.아내의 얼굴을 그려 보았다. 50년 전, 20대 중반의 나이로 시집을 와 강산이 다섯 번이나 변하는 세월이 흘렀다. 아내의 청춘을 송두리째 바친 것이 우리의 결혼생활이고, 둘째 며느리이면서도 내 부모님이 생을 마감하실 때까지 정성으로 모신 아내의 그 착한 마음이 생각났다.젊은 시절, 나는 며느리도 자식이니 내 부모님께 효도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고, 부모님이 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