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히 깊어 가는 밤이다. 외로움 속에 그리움을 꿈꾸어 본다. 어머니의 정성이 담긴 잔치국수와 적당히 익은 김치를 머리만 베어 손으로 쭉쭉 찢어서 서로 많이 먹겠다고 다투던 시절, 함께 먹었던 부모 형제가 보고 싶다.

김장철이 되면 어머니는 겨울동안 먹을 김치를 담그기 위해 며칠 전부터 준비를 했다. 배추김치, 총각김치, 동치미는 빠지지 않고 담그신다. 그 중에 제일 신경써서 담는 것은 동치미다. 사람이 들어갈 정도의 큰 항아리에다 담는다. 아버지는 독을 묻기 위해 땀을 흘리시며 땅을 파신다. 겨울 양식이라 하시며 여름부터 정성들여 심고, 거두어, 다듬고, 담궈 땅에 묻는다.

김치도 맛이 있지만 동네에서는 우리집 동치미는 인기가 대단했다. 김치가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컸으면 김치 없인 밥을 못 먹는다고 그 시절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랬다. 난 김치를 좋아해 밥뿐만 아니라 고구마, 떡, 삶은 계란도 김치와 함께 먹는다. 그래서인지 난 건강하다. 요즈음 사람들은 온갖 맛에 길들여져 김치를 신통찮게 생각한다.

김치는 멋과 맛으로 인정받는 한국인의 전통 발효 식품이다. 김치에서 생기는 유산균은 장내 유용한 미생물의 증식에도 도움이 되며 대장암 예방도 좋다고 한다. 김치는 생활의 미학이 담겨 있다. 음식은 먹는 것으로서만 맛을 느끼는 것이 아니다. 시각적으로 느껴지는 멋은 시장기를 느끼게 한다.

중학교 시절이다. 마을에 연탄가스를 마시고 쓰러진 가족이 있었다. 옆집에서 발견해 방에서 밖으로 내보냈다. 마당 한가운데 땅에 코를 대고 개구리처럼 엎드리게 하였다. 흙 냄새를 맡으면 살아난다고 모두들 기다리고 있었다. 갑자기 우리 어머니가 동치미를 큰 물통에 담아와 차례로 먹였다. 조금씩 정신이 돌아왔고 신기하게도 한 명씩 모두 일어났다. 그때부터 우리집 동치미는 약이 되었다. 배가 아파도 동치미를 얻어갔다. 먹으면 낳는다고 소문이 나서 옆 동네까지 인기가 대단했다. 사실은 과학적으로 입증된 바가 없는데 말이다.

약이 귀한 시절이라 그랬는지 모른다. 우리 어머니는 동네에서 누구나 부러워하는 김치 잘 담그는 사람이 되었다. 김장철만 되면 동치미 담는 일이 행사가 되어 이 집 저 집 초대해서 무척 바쁘게 다녔다. 그러나 우리 집 동치미 맛을 따라오지 못했다. 간을 잘 맞추고 찬 공기와 온도를 적절히 조절해야 한다고 했다. 흰 눈이 쌓인 장독위에 발효가 잘되어 톡 쏘는 동치미 국물에 삶은 국수를 넣어 주시던 그 맛은 잊을 수가 없다.

누구에게나 마음 속에 고향의 맛이 있다. 어머니의 손맛은 그리움과 다정함을 품고 있었다. 고향은 어머니의 공간이고 결코 잊혀지지 않는 세월이며 시간이다. 어린 시절의 기억이 일기장이 되어 어른이 되고, 부모가 되고서야 어머니의 사랑과 희생을 알았다. 고향을 떠난 오랜 시간 향수와 그리움은 어머니의 김치와 동치미이다. 하루는 긴 것 같은데 어머니와 함께한 세월은 짧은 것 같다.

하택례 오랜 기간 수필과 시를 쓰면서 작품집 ‘행복한 파랑새’, 시집 ‘별빛으로 만난 행복’을 냈으며, 현재 전몰군경미망인회 은평구지회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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