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가을 시골 사는 먼 친척이 늙은 호박 한 덩이를 선물로 가져왔다. 작은 방에 그대로 있어서, 찹쌀가루 남겨둔 것이 생각나 죽을 쑤어볼 요량으로 몸통을 이리저리 굴려 살폈다. 겨울 동안 썩지는 않았을까 걱정이 되었다. 골이 진 곳에 허연 분이 퍼져 있지만 겉모양이나 빛깔로 보아 그대로인 것 같다. 하지만 배꼽 부분에서 손길이 멈췄다. 짓무른 듯한 상처가 만져졌다. 물엿 같은 물방울이 서너 군데 맺혀 있어 손톱으로 눌러 보니 물컹한 느낌이 손끝에 와 닿는다.

행주질을 말끔히 하여 칼로 반을 쭉 갈라 보았다. 맛깔스런 노란색과 단 냄새가 온 부엌에 은은하게 풍겼다. 거뭇한 곳에 생각보다 속 멍이 많이 번져 있다. 씨를 긁어내어 신문지에 펼쳐 널었다. 혹 다시 호박이 되어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기에….

순간 움직이던 손이 움찔했다. 많은 씨 중에 두 개가 하얀 싹이 되어 머리를 오그리고 있다. 껑충한 키에 뿌리까지 길게 나 있다. 신생아를 받아내는 산파처럼 조심스럽게 싹을 꺼냈다. 호박의 생명력에 경건하고 숙연한 마음이 들었다. 어리디 어린 싹은 손도 대지 못할 만치 가냘팠다.

호박이 속앓이를 하고 있을 때 배꼽을 통하여 바깥 공기가 왕래를 하고, 씨앗은 날숨을 쉬며 방 안의 온기를 빌어 본능적으로 성장을 시도했나 보다. 호박 속의 축축한 습기와 바늘구멍만한 틈새로 넘나드는 바람을 흡입하며 허리조차 바로 펼 수 없는 공간에서도 힘을 다해 햇빛을 원했으리라. 소우주 속에서 몸을 일으켜 발돋움을 시도한 부단함이 보인다. 어두운 구석방에서 때를 알고 기지개를 켠 그 작은 섭리를 어찌 신비롭지 않다 할 수 있을까.

하지만 별안간 부신 빛에 알몸이 된 어린 싹은 좀체 살아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어린 싹의 파란 꿈을 파헤친 나의 손이 미웠으리라. 좀 늦은 감은 있으나 받아낸 씨들을 넓은 화분에 살짝 묻었다. 며칠 후 하얀 깍지의 모자를 쓴 떡잎들이 당당히 열 지어 올라왔다. 나의 게으른 배려를 골내지 않고 신명나게 자라는 고것들이 당차 보인다.

호박은 비교적 비옥한 땅이 아니더라도, 손이 자주 가지 않아도 잘 자란다. 아무렇게나 씨앗을 내다 버리다시피 해도 제 혼자 힘으로 자라는 걸 볼라치면 나약한 사람이 본받을만한 교훈이 된다. 그래서 그런지 호박은 많은 문학작품 속에 등장하기도 한다. 호박 예찬이 나올 만하다.

이런 자연계와 마찬가지로 우리네 삶도 평이하지만은 않은 법이어서 더러는 극한상황에 놓일 때가 있다. 암흑 같은 나락으로 떨어지는 듯하다가도 다시 일어서곤 한다. 우리는 그처럼 무섭도록 아름다운 인내의 과정까지도 모두 다 진실한 삶의 모습으로 인정해야 한다. 봄은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그저 마음속으로 느끼고 바라보는 것만으로 신비롭기만 하다.

김대규 시인의 ‘어둠에 휩싸일수록 작은 빛을 찾아라’하는 시 한 구절이 스친다.

이영숙 독립유공자 후손이자 6·25참전유공자의 배우자로 오랜 기간 수필을 써왔다. 수필집 ‘행복의 바이러스’ ‘바람이 다니던 길’ ‘희망 리포트’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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