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범 경비원으로 선발되어 부상으로 현금 10만원을 받았다. 동료들과 국밥 한 그릇씩 나눠 먹고도 20kg짜리 쌀 한 포대를 살 돈이 남았다. 그 돈으로 쌀을 사서 무료급식소를 찾아갔다.

아내가 급식을 나눠주시는 분께 점심 한 끼를 하는 데 쌀이 얼마나 필요하냐고 물으니 그분은 500명 정도니까 20kg짜리 쌀 여섯 포대가 필요하다고 하였다. 아내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이후 아내의 생일날이 다가오자 아내는 묻지도 말고 따지지도 말고 30만 원만 달라고 하였다. 모든 통장을 다 쥐고 가정 경제를 운영하는 아내다. 평소 헛돈 한 푼 쓰지 않는 성격을 잘 아는 나는 통장을 달라고 해서 30만 원을 선뜻 건넸다. 이런 절차는 아내가 나에게 통보하는 절차다. 통보 없이 달라고 한다 해도 나는 반대하지 않는다.

아내의 회갑년 생일이었다. 생일 하루 전날 아내가 시키는 대로 승용차를 쌀가게로 향했다. 아내는 쌀 여섯 포대를 사더니 무료급식소로 가자고 하였다.

많은 노인이 와서 급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내와 나는 주방에 쌀 여섯 포대를 내려놓고 차를 돌려 나오는데 급식 차례를 기다리던 할머니 한 분이 우리 부부를 보고 꾸벅 절을 하였다. 어른한테 인사를 받으니 면구스러웠다.

쌀을 가져다준 이튿날이 아내의 생일이었으니 생일 축하객이 500명이 온 셈이다. 가족들과 외식 한 번 할 돈으로 성대한 잔치를 한 셈이다. 우리 집에서는 아내가 결정하면 모두가 따라야 한다. 아내의 이런 결정을 아이들은 늘 독재자 가정이라고 농담을 하면서 한바탕 웃음을 짓곤 하지만, 내심 자랑스러워한다.

아내는 천성이 남 돕기를 좋아하지만, 정작 자신의 생일에는 미역국 한 그릇에 국수 한 그릇이면 만족하는 검소함이 몸에 밴 사람이기에 아이들이 가정의 독재자로 몰아세워도 나에게는 언제나 둥둥 내 사랑이다.

내 생일과 아내 생일은 일주일 차이로 내 생일이 더 빠르다. 객지 생활하는 아이들이 일주일 차이로 다가오는 생일을 각각 챙기기는 힘들다. 아내도 그 사정을 잘 안다. 그래서 항상 내 생일에 묻히고 말지만 아내는 앞으로도 이런 성대한 생일을 보낼 것이다.


김일태 육군 대위로 전역해 해군에서 예비군 지휘관으로 일했으며, 해병대에서 정년퇴직했다. 보국훈장 광복장을 받고 국가유공자가 됐다. 현재 아파트 경비원으로 일하며 따뜻한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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