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자에게는 세 가지 즐거움이 있다.

첫째로 부모님이 아직 건강하게 살아계신다면 즐거움 중에 으뜸이라 여길 수 있다. 그러나 내 나이가 있기도 하거니와 지병으로 아버지와 어머니는 벌써 오래 전에 저세상으로 떠나셔서 난 천애고아가 됐다.

이제는 천애지각으로 하늘 끝과 땅의 귀퉁이에 아득하게 멀리 떨어져 있음을 알았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부모님을 땅에 뉘어보지 않은 사람은 인생을 논할 가치가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장례 모시는 날 장지에서 남은 사람들은 ‘자 이제 마지막이니 흙을 한 삽 떠서 뿌리시오’ 하는 말을 듣는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말이었고, 간이 오그라드는 듯한 슬픔을 느끼는 순간이다.

둘째로 형제들이 모두 탈 없이 이 험한 세상을 잘 살아가는 일이다. 형편이 좋아 때를 잘 만나, 또는 부모를 잘 만나 교육을 고르게 받고 사회의 한 일원으로 비교적 대접 받으며 살아갈 수만 있다면 오죽이나 좋으랴. 그러나 인생살이란 그렇지 못한 것이어서 상황도 여러 형태로 벌어진다. 여러 형제들 중 맏아들은 높은 학교까지 무난하게 보내고 많이 가르쳤기에 인생의 탄탄대로를 걸을 수 있어 사회적 지휘를 누리며 산다. 반면 가세가 기울기라도 하면 아래 동생들은 만학의 기회마저 놓쳐 힘든 농사일이나 하게 두는 경우도 있다. 이때부터 운명의 갈등은 시작된다. 세상에 나와서 첫 경쟁자는 형제라는 말이 있다. 결국 형제들 속에서 세상을 익히고 배워 나가는 것이다.

나도 형제가 육 남매나 된다. 동생만 다섯이다. 동생 하나가 제 가정을 잘 다스리지 못하고 방랑자 생활을 하니 맏이인 내 가슴은 늘 무거운 돌이 하나 짓누르는 것 같이 맘이 아리다. 그 동생은 어려서는 참으로 영특하고 약삭빨랐다. 나이 들면서 뜬구름 잡는 식으로 세상을 만만히 보았으나 상황은 그렇게 쉽게 돌아가지 않았던 모양이다.

셋째로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워할 것이 없는 것과 천하의 영재를 얻어서 교육하는 것을 꼽을 수 있다.

머리 좋은 영재를 제자로 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한문이나 영어, 글짓기, 그림그리기, 또는 노래 교실이라든가 문하생을 두기란 어렵지 않겠으나 뛰어난 수재를 만나기는 어렵다.

아래층에 사는 초등여학생 엄마가 내게 딸의 글짓기지도를 해줄 수 없냐고 졸라왔다. 지난해 자전 수필집을 한 권 선물했더니 읽어보고선 자기 딸의 글짓기를 지도해줬으면 하고 채근하는 것이었다. 좋은 의미에선 남을 가르친다는 것은 내 공부를 한 번 더하게 되는 것이고 글짓기지도에 앞서 자료조사도 해야되므로 준비가 걱정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내가 알고 있는 짧은 지식이라도, 눈이 더 어둡기 전에 후학을 위해서 사회에 반납해야 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재능 나눔’은 좋은 사회의 필요조건이다.

세 번째 낙에 이제 도전해 보려한다. 즐겁게, 그리고 세상에 도움이 되게.

이영숙 독립유공자 후손이자 월남전참전유공자의 배우자로 오랜 기간 수필을 써왔다. 수필집 ‘행복의 바이러스’ ‘바람이 다니던 길’ ‘희망 리포트’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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