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은 진정으로 이와 같은 죽음과 소멸의 길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일까요.

우리들의 육신은 태어났다가 죽는다고 합니다. 그러면 왜 육신은 태어났다가 죽는 것일까요. 그것은 태어나는 것은 좋아하고, 죽는 것은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이 없다면 태어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습니다. 과학은 육신의 근본이 되는 물질이 무엇인지 아직까지도 모르고 있습니다. 육신의 근본이 무엇인지 모르는 우리들이 ‘육신은 태어나고 죽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어리석음의 비약일 뿐입니다.

우리들의 육신은 본래 태어나고 죽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태어나는 것이 따로 있고, 죽는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태어남은 자신만으로는 아무런 의미와 뜻도 없으며, 스스로 있지 못하고 죽음으로 인하여 있을 수 있으므로 태어남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태어남은 없는 것인가. 태어남은 없는 것도 아닙니다. 태어남은 스스로 없을 수 없으며, 죽음이 없을 때 없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태어남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닙니다. 죽음 또한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닙니다.

이렇듯 태어남과 죽음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둘로 나뉘어 있지 않고 서로 융합 융통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태어남과 죽음이 서로 융합하는 것을 마음 또는 성품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 육신은 바로 이 마음입니다. 왜 그런가하면, 육신이라는 이름이 곧 이 마음이고, 육신을 구성하는 의미와 육신을 나타내고 표현하는 뜻이 곧 이 마음이며, 육신을 좋아하고 싫어하는 느낌이 곧 이 마음이고, 육신의 그다운 역할과 작용의 비물질이 바로 이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 마음을 알지 못합니다. 이 마음은 깨쳐야 알 수 있습니다.

우리들은 태어나 젊고 건강한 육신은 좋아해서 더욱 젊고 건강하며 오랫동안 보전하기를 원하고, 늙고 병들어 죽는 육신은 싫어해서 이를 버리고 벗어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좋은 육신을 취하려는 욕망은 한이 없어서 끝내 좋아하는 젊고 건강한 육신을 취하지 못하는 고통에 떨어지고, 늙고 병들어 죽는 육신을 버리려는 욕망 또한 한이 없으므로 끝내 버리지 못하는 고통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늙고 병든 육신을 싫어해서 버리려 하지 않으면 늙고 병든 육신은 본래 있는 것이 아니며, 젊고 건강한 육신을 좋아해서 취하려 하지 않으면 젊고 건강한 육신이 본래부터 없는 것도 아닌 것이 참된 육신입니다.

성현들도 ‘태어나서 젊고 건강하다가 늙고 병들어 죽는 소멸과 이를 바라보는 것을 싫어하고 좋아하는 생각이 오직 이 마음’이라는 것을 깨치고 일체의 모든 고통을 벗어나 대자유인이 되었습니다. 우리들도 이 마음을 깨달아 영원히 무너짐이 없는 참된 육신과 행복을 찾아가는 새로운 삶의 여정을 이제 시작해야 합니다.  

강제훈 월남전참전유공자이며 현재 경북 안동에서 글을 쓰면서 마음수련을 하며 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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