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르무 담보바는 6·25전쟁 중 강뉴부대원으로 두 차례 참전했다. 그는 아프리카 유일한 파병국인 에티오피아의 1진 강뉴전사 1,185명 중 없어서는 안 될 인재였다. 1951년 하일레 셀라시 황제의 명을 받아 참전하게 된 구르무 담보바는 생사를 넘나드는 전장에서 생전 처음 경험하는 눈보라와 혹한에 맞서 싸웠다. 텐트와 동굴생활을 하면서도 적과 격전을 펼쳐 강원도 화천, 철원 일대 700고지, 낙타고지, 요크고지 전투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그는 불행하게도 전투 중 허벅지와 엉덩이 관통상을 입어 고국으로 돌아갔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조마리아 여사는 1862년 황해도 해주군에서 3남 2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조 여사는 황해도 해주군 광석동에 사는 동갑내기 안태훈과 혼인해 안중근(1879~1910), 안성녀(1881~ 1954), 안정근(1884~1949), 안공근(1889~1939) 등 3남 1녀를 뒀는데, 이들은 모두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1907년 7월 안중근의사가 독립운동을 위해 고국을 떠나면서 모친에게 작별을 고할 때 조 여사는 “집안일은 생각지 말고 최후까지 남자답게 싸우라”는 천금 같은 격려를 해주었다. 1909년 10월 26일, 안 의사가 중국 하
미 제24사단 전투공병대대 소속인 조지 리비 중사는 1950년 7월 20일 대전 전투 당시, 산악철수가 불가능한 부상병을 모두 차량에 태워 철수작전을 펼쳤다. 하지만 철수 중 북한군의 사격을 받아 희생자가 계속 발생하고 더 이상 전진이 불가능한 진퇴양난에 빠지게 됐다.그는 재빠른 상황판단과 살신성인의 리더십을 발휘해 때마침 철수 중이던 포병 M-5 포차를 정지시키고 부상병을 태운 후 자신은 기관단총으로 도로 주변의 적과 치열한 교전을 벌였다. 그는 포차 운전병을 자신의 몸으로 감싸며 ‘책임지고 보호할테니 전속력으로 달려라’라고 외치
장덕준 선생은 1892년 황해도 재령의 빈농 집안 출신으로 1914년 평양일일신문사에 입사해 조선문 신문부 주간으로 근무하면서 조만식, 김동완, 이덕환 등 평양 주요 지식인들과 교류했다.1919년 김성수 선생과 함께 조선의 인재양성을 위해 우수한 학생을 외국에 유학시키려는 목적으로 ‘육영회’설립을 추진했으나 매년 100원 이상 내야 하는 회비 부담과 3·1운동이 일어난 시기적 상황에서 총독부 고등경찰의 방해와 탄압에 의해 무산됐다. 1920년에는 김성수, 장두현 선생 등과 함께 민간신문인 동아일보 창간에 참여해 논설반원과 통신부장,
최용남 해군 중령은 1950년 4월 제2함대 PC-701 함장으로 부임했다. ‘백두산’으로 이름 붙은 PC-701함은 당시 대한민국 해군이 보유한 유일한 전투함으로 전투함 없는 해군을 안타깝게 여긴 해군 전 장병과 국민이 갹출한 성금으로 구입한 것이다.최 함장은 6·25전쟁 발발 당일 동해로 긴급히 출동하던 중 부산 동북방 해상에서 무장병력 600여 명이 탑승하고 남하하는 1,000톤급 북한 무장 수송선을 발견했다. 칠흑 같은 어둠과 악천후 속에서 5시간에 걸친 추격과 교전이 시작됐고, 적전은 완강히 저항했으나 최 함장의 탁월한 함
방정환 선생은 서울 출신으로 1913년 선린상업학교 재학 중 천도교에 입교했으며 1917년 권병덕 선생의 소개로 천도교주인 손병희 선생의 딸 손용화와 결혼했다.선생은 1908년 소년 입지회를 통해 최초로 사회운동에 참여했으며 1918년 경성청년구락부를 조직해 청소년 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1919년 3·1운동 당시 천도교청년회 회원으로 만세운동 준비에 협력하고 ‘개벽사’를 설립해 월간지 ‘개벽’을 발간하며 기자로 활동했다. 이후 선생은 동료 오일철과 함께 자택에서 ‘독립신문’을 등사해 배포하다 일경에 체포돼 갖은 고문을 당했으나
휴전이 임박한 1953년 5월 수도사단 기갑연대 10중대 3소대 3분대장 백재덕은 중부전선의 금성·김화지역 주저항선에서 매복작전을 전개하고 있었다. 당시 그의 부대가 지키던 샛별고지는 상호접근이 곤란한 전술적 요충지였다. 5월 15일 매복작전 중 백 분대장은 중공군 3개 중대가 진지로 접근해오는 것을 발견했다. 매복진지가 돌파될 경우 중대 전체에 위기가 될 것임을 직감한 그는 “여기서 적을 꺾지 못하면 중대의 주진지가 위태롭다. 전 분대원은 나와 함께 이곳에 뼈를 묻자”고 분대원들을 독려했다.백 분대장은 침착하게 적의 접근을 기다렸
이상정 선생은 대구에서 재력을 갖춘 경주 이씨 가문에서 출생해 일찍 부친을 여의고 조부 슬하에서 성장했다.선생은 1909년 초 일본으로 건너가 세이죠 중학교에서 수학하고 1917년 이후 대구 계성학교와 정주 오산학교 등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1920년대 초반 평안도 등에서 교사로 재임하며 사회운동을 전개 했다.1925년 중국으로 망명한 이후 중국 하북성 등지에서 풍옥상 군 참모부의 막료로 근무했으며 같은 부대에서 근무하던 최초의 여류 비행사인 권기옥을 만나 결혼했다. 1927년 권기옥이 상해 동로항공사령부의 비행원이 되자 상해로 이주
이순호 대위은 제7사단 제3연대 제3대대 제9중대장으로 강원도 양구의 1090고지(크리스마스 고지) 전투에 참전했다. 크리스마스 고지는 육군 제7사단이 담당한 전선 중 최북단에 위치한 곳으로 적의 주요 저항선인 어은산에 이르는 요지다. 1952년 10월 6일 어은산 일대에 포진하고 있던 중공군 제204사단이 기습 공격하면서 크리스마스고지 전투가 발발했다. 적은 300여 발의 공격준비사격을 한 후 파상공세를 감행해왔고, 중대는 포병 지원 아래 혼신의 힘을 다했으나 적의 압도적인 화력에 밀려 고지 남쪽으로 철수했다.거듭되는 포위와 압박
충북 청주 출신인 선생은 민족대표 33인 중 한 분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는 등 만세운동을 주도했다.선생은 18세 쯤 동학에 입도한 후 1894년 손병희와 함께 6만 명의 교도를 이끌고 동학혁명에 참여했다. 1908년 손병희 선생이 일본에서 귀국해 천도교를 일으키자 이에 입교해 전제관장, 이문관장 대리, 금융관장, 보문관장 등을 역임했다. 1919년 2월 25일경 천도교 기도회 종료보고와 광무황제 국장 참배를 위해 상경해 천도교 지도자인 손병희, 권동진, 오세창 선생 등과 함께 3월 1일 독립선언에 민족대표로 참여하기로 했다,2월
김형우 삼조는 해병 독립 제5대대 분대장으로 1951년 6월 24일부터 7월 23일까지 김포지구 월암리 전투에 참가했다.당시 독립 5대대는 육군 제1사단의 작전지시에 따라 월암리에 정찰대 본부를 두고 개성 방면의 철저한 수색을 감행하며, 장애물 설치, 진지 보강 등 방어에 만전을 기하고 있었다. 수색작전은 긴박한 상황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고, 미 제1군단장과 육군 제1사단장으로부터 “수색정찰의 철저여하에 따라 승패가 좌우된다. 티끌만한 움직임도 놓치지 마라”는 특별지시가 거듭 내려왔다. 1951년 7월 23일 2개 소대로 편성된 정
이태준 선생은 1883년 경남 함안에서 2형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선생은 세브란스의학교 재학시절 안창호의 추천으로 비밀결사 신민회의 자매청년단체인 청년학우회에 가입했다. 그러나 105인 사건으로 체포위기에 처하자 김필순과 함께 중국 남경으로 망명했다.선생은 남경에서 중국인 기독교인의 도움으로 기독회 의원 의사로 취직했으나 몽골에 비밀군관학교 설립 계획을 하고 있던 김규식의 권유로 1914년경 몽골 고륜(현재 울란바토르)으로 옮겨 동의의국이라는 병원을 개원했다. 선생은 몽골에 근대적 의술을 도입해 몽골 국민에게 큰 신망을 얻었으며
리지웨이는 6·25전쟁 발발 6개월 후인 1950년 12월 미 제8군사령관에 부임했다. 당시 유엔군은 11월 25일 시작된 중국군의 제2차 공세에 밀려 38도선으로 철수한 상태로, 패배의식이 만연해 있었다. 중국군의 제3차 공세로 평택에서 삼척을 잇는 선까지 또다시 후퇴한 이후 유엔군의 위기의식은 최고조에 달해 곧 한반도를 포기하고 철수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실제로 당시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대한민국을 포기하라는 지시를 내렸지만, 오히려 이때 리지웨이는 후퇴를 허락하지 않는 빛나는 리더십을 발휘해 전세를 역전시켰다. 195
이소응 선생은 1872년 22세 때 화서 이항로의 제자인 성재 유중교의 문하에 들어가 화서학파의 일원이 됐다. 특히 제천의병장 의암 유인석 선생과는 동문 선배이자 동지인 동시에 정신적 지도자로서 기대며 일생동안 항일투쟁 등 활동의 궤적을 함께 했다. 선생은 1876년 개항 때 최익현 선생 등 화서학파 동문들과 함께 반대상소를 올려 일제의 침략성을 규탄하며 처음으로 세상에 그 성명을 드러냈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단발령을 계기로 전국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자 선생은 1896년 춘천의병장에 올라 항일투쟁의 선봉에 섰다. 춘천의
이기협 대령은 1948년 9월 항공병 2기생으로 입대했다. 6·25전쟁 발발 직후인 6월 28일, 당시 이등상사였던 그는 미 군사고문단의 L-5 연락기 2대가 여의도기지에 방치돼 있다는 보고를 받고, 수원기지까지 연락기를 무사히 이동시키는 전공을 세웠다. 전시에 아군기 한 대라도 더 보존해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적 대공포의 위협을 무릅쓰고 이뤄낸 결과였다. 그는 이때부터 리더십을 인정받아 1950년 9월 공군소위로 임관했다. 이후 F-51 전투기조종사 전환교육을 받고 강릉 제10전투비행단에 배속돼, 지리산 공비토벌을 위한 1951년
최수봉 선생은 1894년 경남 밀양 출신으로 향리의 개량서당을 다니며 한문과 유교적 가르침을 익히고 신지식도 섭렵했다. 그 후 김원봉 선생과 함께 밀양공보를 다니던 중 단군이 일본 대화족 시조의 아우라고 주장한 일본인 교사에게 항의했다는 이유로 퇴학당했다. 선생은 1910년 사립 동화학교에 편입해 김대지 선생 등 독립운동가의 가르침을 받으며 조국애와 항일의식을 키워갔다. 1912년 범어사가 운영하는 부산 명정학교와 1913년 평양 숭실학교를 다녔다.ㅇ1916년 평안도에서 광부와 우편배달부 생활을 한 후 독립운동의 주요 거점인 봉천(
스톤 중령은 1950년 12월 18일 캐나다군 최초로 장교 44명, 사병 873명으로 편성된 경보병연대 제2대대를 이끌고 부산항에 도착했다.선발대로 참전한 경보병연대 제2대대는 대대장 스톤 중령의 지휘아래 곧바로 경남 밀양천 둔치에 캠프를 설치하고 현지 적응훈련을 시작했으며 열악한 작전환경을 극복해 본대인 캐나다 제25여단이 신속히 한국 전선에 투입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했다. 한국 땅을 밟은 캐나다 군에게 스톤 중령은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2차대전에 참전했던 스톤은 6·25전쟁이 발발하자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고자 했던 평소의 신념
선생은 1874년 경기도 용인에서 군수인 이경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헐버트가 세운 육영공원에서 근대학문을 익혔다. 1894년 과거시험에 응시해 성균관 진사에 합격한 후 한성부 주사에 임명됐으며 1899년 관립 영어학교 교관으로 후학을 지도했다. 1901년 3월 민영돈이 주영공사로 임명될 때 선생도 주영공사관 참서관으로 함께 영국으로 파견됐다. 선생은 영국의 상류층 인사들과 두터운 친분을 쌓으면서 한국의 독립과 영토 보존을 위해 노력했다. 선생은 러시아와 일본 간 전쟁이 벌어질 것을 예상하고, 이를 방지하기 위해 ‘한반도 중립화
이장원 중위는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4월 해병사관후보생 5기로 입대해 그해 9월 소위로 임관 후 후방교란과 해안봉쇄작전을 수행하는 해군 엄호의 임무를 띠고 해병 독립42중대 소속 황토도 파견소대장으로 부임했다.당시 황토도는 함경남도 영흥만 주변 아군의 해상 봉쇄선상에 위치한 전략적 요충지로서 북한은 이 거점을 장악하기 위해 호시탐탐 기습 공격을 시도하는 곳이었다. 1951년 11월 29일, 황토도를 향한 두 차례의 선제 기습공격이 이장원 부대에 의해 잇따라 실패하자 북한군은 1개 대대 규모의 병력을 동원해 황토도에 최후
나운규 선생은 함북 회령 출신으로 1919년 3월 함북 회령에서 만세운동에 참여하다 일경의 수배를 받게 되자 북간도로 이동했다.1920년 선생은 훈춘에서 대한국민회 한순범 등과 함께 일제 나남 사단본부와 회령 수비대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인 청회선 철도 파괴와 통신선 절단 계획에 참여하는 등 독립군으로 활동했으며 청산리 인근에서 독립군 훈련을 받았다.이후 일제가 청회선 철도 파괴 계획에 대한 비밀문서를 입수하고 선생과 관련자들을 체포해 1921년 3월 보안법 위반으로 2년간 옥고를 치렀다. 출소 후 회령에 머물던 선생은 192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