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원 중위는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4월 해병사관후보생 5기로 입대해 그해 9월 소위로 임관 후 후방교란과 해안봉쇄작전을 수행하는 해군 엄호의 임무를 띠고 해병 독립42중대 소속 황토도 파견소대장으로 부임했다.

당시 황토도는 함경남도 영흥만 주변 아군의 해상 봉쇄선상에 위치한 전략적 요충지로서 북한은 이 거점을 장악하기 위해 호시탐탐 기습 공격을 시도하는 곳이었다.

1951년 11월 29일, 황토도를 향한 두 차례의 선제 기습공격이 이장원 부대에 의해 잇따라 실패하자 북한군은 1개 대대 규모의 병력을 동원해 황토도에 최후의 일격을 가해왔다. 북한군으로서는 자존심이 걸린 상륙작전이었다.

적과 치열한 교전 중 무전기마저 파괴돼 아군의 지원도 기대할 수 없는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이장원 중위와 그의 소대는 물러서지 않았다. 악조건 속에서도 좀처럼 물러서지 않는 해병에 당황한 적은 아군 진지에 집중포격을 가했고, 이장원 중위와 그의 부하 3명은 결국 적의 포탄에 전사했다.

소대장의 최후를 눈앞에서 맞이한 그의 소대는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북한군을 격멸, 진지를 사수했다.

이로써 3차례에 걸친 북한군의 황토도 공격은 모두 실패로 끝났으며, 이 전투로 아군은 적의 핵심 해상보급로를 차단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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