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운규 선생은 함북 회령 출신으로 1919년 3월 함북 회령에서 만세운동에 참여하다 일경의 수배를 받게 되자 북간도로 이동했다.

1920년 선생은 훈춘에서 대한국민회 한순범 등과 함께 일제 나남 사단본부와 회령 수비대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인 청회선 철도 파괴와 통신선 절단 계획에 참여하는 등 독립군으로 활동했으며 청산리 인근에서 독립군 훈련을 받았다.

이후 일제가 청회선 철도 파괴 계획에 대한 비밀문서를 입수하고 선생과 관련자들을 체포해 1921년 3월 보안법 위반으로 2년간 옥고를 치렀다. 출소 후 회령에 머물던 선생은 1924년 1월 극단 예림회에 가입해 연극배우로 활동했다.

1926년 선생은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한 영화 ‘아리랑’을 제작해 당대의 현실 문제를 고발하면서 일약 조선영화계를 대표하는 인물로 주목받았다. 선생은 이어 ‘풍운아’, ‘잘있거라’, ‘사랑을 찾아서’ 등을 제작했는데, 특히 ‘사랑을 찾아서’의 원제는 ‘두만강을 건너서’였으나, 일제의 검열 과정에서 문제가 돼 제목을 바꿔서 발표하기도 했다.

1931년 폐병이 악화된 가운데 선생은 병중에도 ‘오몽녀’등의 작품을 제작했으나 병세가 더욱 나빠져 1937년 8월 9일 향년 36세로 사망했다.

칠흑같이 어두운 시대였기에 만드는 영화마다 일제의 검열에 잘려나가기 일쑤였으나 그런 상황에서도 선생은 영화를 통해 조선인 관객들을 울고 웃게 하면서 민족의식을 크게 고취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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