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마리아 여사는 1862년 황해도 해주군에서 3남 2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조 여사는 황해도 해주군 광석동에 사는 동갑내기 안태훈과 혼인해 안중근(1879~1910), 안성녀(1881~ 1954), 안정근(1884~1949), 안공근(1889~1939) 등 3남 1녀를 뒀는데, 이들은 모두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1907년 7월 안중근의사가 독립운동을 위해 고국을 떠나면서 모친에게 작별을 고할 때 조 여사는 “집안일은 생각지 말고 최후까지 남자답게 싸우라”는 천금 같은 격려를 해주었다.

1909년 10월 26일, 안 의사가 중국 하얼빈 역에서 한국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고 뤼순감옥에 투옥됐을 때 조 여사는 평양으로 가 아들의 변호를 요청했다. 이후 1910년 2월 14일 일제가 안 의사에게 사형을 언도하자 조 여사는 분노를 표하며 “이토가 많은 한국인을 죽였으니, 이토 한 사람을 죽인 것이 무슨 죄냐”며 일제의 안 의사 재판을 강하게 질타했다.

조 여사는 뤼순감옥으로 형을 면회하러 가는 아들들에게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게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다른 마음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는 형(刑)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라는 마지막 당부를 전했다고 한다.

조 여사는 이후 평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하다 1927년 7월 15일 상해에서 66세로 별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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