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제24사단 전투공병대대 소속인 조지 리비 중사는 1950년 7월 20일 대전 전투 당시, 산악철수가 불가능한 부상병을 모두 차량에 태워 철수작전을 펼쳤다. 하지만 철수 중 북한군의 사격을 받아 희생자가 계속 발생하고 더 이상 전진이 불가능한 진퇴양난에 빠지게 됐다.그는 재빠른 상황판단과 살신성인의 리더십을 발휘해 때마침 철수 중이던 포병 M-5 포차를 정지시키고 부상병을 태운 후 자신은 기관단총으로 도로 주변의 적과 치열한 교전을 벌였다. 그는 포차 운전병을 자신의 몸으로 감싸며 ‘책임지고 보호할테니 전속력으로 달려라’라고 외치
최용남 해군 중령은 1950년 4월 제2함대 PC-701 함장으로 부임했다. ‘백두산’으로 이름 붙은 PC-701함은 당시 대한민국 해군이 보유한 유일한 전투함으로 전투함 없는 해군을 안타깝게 여긴 해군 전 장병과 국민이 갹출한 성금으로 구입한 것이다.최 함장은 6·25전쟁 발발 당일 동해로 긴급히 출동하던 중 부산 동북방 해상에서 무장병력 600여 명이 탑승하고 남하하는 1,000톤급 북한 무장 수송선을 발견했다. 칠흑 같은 어둠과 악천후 속에서 5시간에 걸친 추격과 교전이 시작됐고, 적전은 완강히 저항했으나 최 함장의 탁월한 함
휴전이 임박한 1953년 5월 수도사단 기갑연대 10중대 3소대 3분대장 백재덕은 중부전선의 금성·김화지역 주저항선에서 매복작전을 전개하고 있었다. 당시 그의 부대가 지키던 샛별고지는 상호접근이 곤란한 전술적 요충지였다. 5월 15일 매복작전 중 백 분대장은 중공군 3개 중대가 진지로 접근해오는 것을 발견했다. 매복진지가 돌파될 경우 중대 전체에 위기가 될 것임을 직감한 그는 “여기서 적을 꺾지 못하면 중대의 주진지가 위태롭다. 전 분대원은 나와 함께 이곳에 뼈를 묻자”고 분대원들을 독려했다.백 분대장은 침착하게 적의 접근을 기다렸
이순호 대위은 제7사단 제3연대 제3대대 제9중대장으로 강원도 양구의 1090고지(크리스마스 고지) 전투에 참전했다. 크리스마스 고지는 육군 제7사단이 담당한 전선 중 최북단에 위치한 곳으로 적의 주요 저항선인 어은산에 이르는 요지다. 1952년 10월 6일 어은산 일대에 포진하고 있던 중공군 제204사단이 기습 공격하면서 크리스마스고지 전투가 발발했다. 적은 300여 발의 공격준비사격을 한 후 파상공세를 감행해왔고, 중대는 포병 지원 아래 혼신의 힘을 다했으나 적의 압도적인 화력에 밀려 고지 남쪽으로 철수했다.거듭되는 포위와 압박
김형우 삼조는 해병 독립 제5대대 분대장으로 1951년 6월 24일부터 7월 23일까지 김포지구 월암리 전투에 참가했다.당시 독립 5대대는 육군 제1사단의 작전지시에 따라 월암리에 정찰대 본부를 두고 개성 방면의 철저한 수색을 감행하며, 장애물 설치, 진지 보강 등 방어에 만전을 기하고 있었다. 수색작전은 긴박한 상황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고, 미 제1군단장과 육군 제1사단장으로부터 “수색정찰의 철저여하에 따라 승패가 좌우된다. 티끌만한 움직임도 놓치지 마라”는 특별지시가 거듭 내려왔다. 1951년 7월 23일 2개 소대로 편성된 정
리지웨이는 6·25전쟁 발발 6개월 후인 1950년 12월 미 제8군사령관에 부임했다. 당시 유엔군은 11월 25일 시작된 중국군의 제2차 공세에 밀려 38도선으로 철수한 상태로, 패배의식이 만연해 있었다. 중국군의 제3차 공세로 평택에서 삼척을 잇는 선까지 또다시 후퇴한 이후 유엔군의 위기의식은 최고조에 달해 곧 한반도를 포기하고 철수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실제로 당시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대한민국을 포기하라는 지시를 내렸지만, 오히려 이때 리지웨이는 후퇴를 허락하지 않는 빛나는 리더십을 발휘해 전세를 역전시켰다. 195
이기협 대령은 1948년 9월 항공병 2기생으로 입대했다. 6·25전쟁 발발 직후인 6월 28일, 당시 이등상사였던 그는 미 군사고문단의 L-5 연락기 2대가 여의도기지에 방치돼 있다는 보고를 받고, 수원기지까지 연락기를 무사히 이동시키는 전공을 세웠다. 전시에 아군기 한 대라도 더 보존해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적 대공포의 위협을 무릅쓰고 이뤄낸 결과였다. 그는 이때부터 리더십을 인정받아 1950년 9월 공군소위로 임관했다. 이후 F-51 전투기조종사 전환교육을 받고 강릉 제10전투비행단에 배속돼, 지리산 공비토벌을 위한 1951년
스톤 중령은 1950년 12월 18일 캐나다군 최초로 장교 44명, 사병 873명으로 편성된 경보병연대 제2대대를 이끌고 부산항에 도착했다.선발대로 참전한 경보병연대 제2대대는 대대장 스톤 중령의 지휘아래 곧바로 경남 밀양천 둔치에 캠프를 설치하고 현지 적응훈련을 시작했으며 열악한 작전환경을 극복해 본대인 캐나다 제25여단이 신속히 한국 전선에 투입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했다. 한국 땅을 밟은 캐나다 군에게 스톤 중령은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2차대전에 참전했던 스톤은 6·25전쟁이 발발하자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고자 했던 평소의 신념
이장원 중위는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4월 해병사관후보생 5기로 입대해 그해 9월 소위로 임관 후 후방교란과 해안봉쇄작전을 수행하는 해군 엄호의 임무를 띠고 해병 독립42중대 소속 황토도 파견소대장으로 부임했다.당시 황토도는 함경남도 영흥만 주변 아군의 해상 봉쇄선상에 위치한 전략적 요충지로서 북한은 이 거점을 장악하기 위해 호시탐탐 기습 공격을 시도하는 곳이었다. 1951년 11월 29일, 황토도를 향한 두 차례의 선제 기습공격이 이장원 부대에 의해 잇따라 실패하자 북한군은 1개 대대 규모의 병력을 동원해 황토도에 최후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과 28일 서울 수복으로 인해 갑자기 남쪽에 고립된 북한군은 지리산에 들어가 게릴라 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이 무렵 산청경찰서에서 순경으로 근무하던 강삼수는 사찰유격대장으로 임명받고 그 지역 북한군 무장 세력과 빨치산을 소탕하는 등 경찰관으로서 주민과 지리산을 지켜내는데 큰 공을 세웠다. 강삼수의 부대는 10명 내외의 인원에도 불구하고 주변 산세의 지형지물과 지리를 철저히 활용해 북한 정예군 출신을 비롯한 수많은 적과의 전투에서 지속적인 승리를 거뒀다. 이러한 전공이 알려지자 강삼수와 그의 부대
1948년 12월 육군사관학교 8기로 입교해 1949년 소위로 임관, 수도경비사령부 제17연대 11중대장으로 임명된 김동석 대령은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북한군 제15사단 45연대와의 화령장 전투에서 적군을 궤멸시키는 공적을 세웠다. 이 공적으로 전 연대원이 1계급 특진의 영광을 누리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1950년 9월 김 대령은 미8군 정보연락장교로 파견돼 서울 탈환작전을 위한 첩보업무를 담당했다.그가 수집한 적군의 핵심 정보는 맥아더 장군에게 직접 전달돼 아군의 서울 탈환과 북진 작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것으로
1950년 8월 남으로 밀고 내려오던 북한군은 서해안 연안 가까이에 있는 일부 도서를 점령해 무고한 주민을 학살하고 아군 함정의 동정을 감시하는 거점으로 활용했다. 이에 해군은 인천상륙에 필요한 정보수집과 교두보 확보를 위해 각 함정의 승조원들로 구성된 상륙부대(육전대)를 편성하고 덕적도와 영흥도 탈환작전을 전개했다. 덕적도는 위치상 인천항 입구를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에 인천상륙작전을 성공하기 위해 먼저 확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1950년 8월 18일, 아군의 함포지원을 받으며 덕적도에 성공적으로 상륙한 해군 육전대 1소대
1950년 7월 북한군 제2군단은 낙동강 전선을 공격하고 대구와 부산 길목을 차단하려는 목적으로 신속히 포항을 점령하려 했다. 국군 제3사단이 이를 저지하는 임무를 받고 보니 포항 북쪽의 영덕과 강구 중간지점의 요충지인 181고지 점령이 최우선 과제였다.뺏고 뺏기며 고지쟁탈을 위한 혈전이 치열하게 전개되던 중 제3사단은 빼앗긴 181고지를 탈환하기 위해 특공대를 편성하고 아군에게 가장 위협적인 북한군 전차를 격파하기로 결정했다. 이명수 일등상사는 12명의 대원으로 꾸려진 특공대 대장으로 적진에 침투했다. 이때 특공대에 주어진 무기라
6·25전쟁이 발발한 지 채 일주일도 안 돼, 북한군은 한강을 건너 빠르게 남하하기 시작했다. 당시 이러한 적의 상황을 정확히 알아내기 위해서는 항공정찰 이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6·25전쟁이 발발했을 때, 대한민국 공군이 보유하고 있던 항공기는 L-5 연락기 12대와 T-6 훈련기 10대가 전부였다.전쟁 초기 북한군이 한강철교 도하를 시도하자 공군의 이경복 상사와 백성흠 상사 역시 정찰기에 급조된 폭탄을 싣고 수원기지를 이륙해 흑석동 상공으로 방향을 잡았다. 한강 인도교를 발 아래로 보면서 한강철교 쪽으로 기수를 돌려 북쪽 어귀를
마거릿 히긴스는 ‘뉴욕 헤럴드 트리뷴’의 특파원 자격으로 6·25전쟁 발발 이틀 후인 1950년 6월 27일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그는 취재기간 대부분을 최전선에서 보내며 6·25전쟁의 참상과 우리군의 장점과 약점 등을 가감 없이 보도해 6·25전쟁의 실상을 전 세계에 알린 종군기자다. 특히 그는 북한군에게 점령당한 통영지역을 탈환하기 위한 우리 해병대의 통영상륙작전을 직접 취재하면서 그들의 용맹성을 전 세계에 알린다. 당시 그가 헤럴드 트리뷴 본사에 타전했던 “They might even capture the devil(병사들은
6·25전쟁이 발발하자 태국은 자유민주주의 체제 수호를 위해 유엔군의 일원으로 한국에 파병키로 하고 해군 프리깃함 2척과 수송선 1척, 공군 수송기 1개 편대, 항공 의무대를 파병부대로 편성하고 끄리앙끄라이 아따난 중령을 파병부대의 대대장으로 임명했다. 아따난 중령이 이끄는 태국 지상군 1개 대대 병력은 16일 간의 항해 끝에 11월 7일 부산항에 도착했다. 이후 태국군은 평양-수원 철수작전, 상주-문경 주보급로 경비작전, 춘천-화천지구 진격전 등 크고 작은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태국은 한국전쟁시 한국을 지원해 준 아시아 최
오금손 대위는 1930년 독립운동가 오수암 선생의 외동딸로 중국 베이징에서 출생했다. 돌이 되기 전에 부모를 잃은 소녀 오금손은 중국인 가정에서 자라다가 광복군 제3지대에 입대, 항일투쟁의 길로 나서게 된다. 해방 이후 조국에서 개성 간호전문학교를 졸업하고 개성도립병원에서 간호사로 근무하던 오금손은 6·25전쟁이 발발하자 다시 조국을 지키고자 자진 입대한다. 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8월 초 포항 형산강지구 전투에서 부상자들을 돌보던 업무에 임하면서도 오금손은 병원을 기습한 북한군에 당당히 맞서 이를 물리침으로써 2계급 특진, 대
브라이언트 E.무어 장군은 미 육군사관학교 교장을 마치고 맥아더 사령부의 요청에 의해 전쟁이 한창이던 한국에 1951년 1월 31일 미 제9군단장으로 부임했다.그는 입국과 동시에 썬더볼트 작전에 참가, 중공군과 인민군의 대공세에 맞서 유엔군과 함께 경기도와 서울 남부지역에서 반격을 가하는 등 최전선에서 전투를 수행했다.이후 무어장군은 중공군의 4차 공세로 형성된 중동부 전선의 열세지역을 회복하고, 그 지역 내의 적군을 포위하고 격멸하기 위해 다시 킬러작전에 참가했다. 이 작전은 중공군 개입 이후 미8군이 중공군에 대해 실시한 최초의
전투가 한창 막바지로 향하고 있었던 1953년 6월 26일 강원도 양구 인근, 중공군은 야포와 박격포의 지원사격 속에 압도적인 병력을 투입해 아군의 전략적 요충지인 비석고지를 점령했다. 최득수 이등상사가 배속돼 있는 국군 제7사단 8연대 2대대는 백병전까지 치르며 격렬한 반격을 시도했으나 적 수류탄에 대대장까지 전사하는 등 수차례에 걸친 역습에도 적은 물러설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처럼 뺏고 빼앗기는 공방전으로 우리 측 인명 손실만도 1,300여 명에 달할 정도로 전투는 엄청난 희생을 치르고 있었다. 국군 제7사단 8연대 2대대는
그러나 그의 단정도 뱃머리가 파손되는 타격을 입자, 예안리 해안에 상륙한 뒤 적을 향해 기관단총을 연사하며 스스로 표적이 돼 적의 사격을 유인함으로써 피난민의 희생을 최소화했다. 결국 그는 교전 중 흉부와 복부에 관통상을 입고 전사했다.살신성인의 희생정신으로 840명의 피난민을 안전하게 구출한 그는 군인 정신의 귀감으로 기려지고 있으며, 2012년에는 그의 이름을 딴 최첨단 유도탄 고속함(홍대선함)이 진수됐다.1951년 LST-801(천안)함 VP(단정)정장으로 서해경비작전에 참가 중이던 홍대선 삼등병조는 1952년 1월 4일 피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