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경복 상사(좌) 백성흠 상사(우)

6·25전쟁이 발발한 지 채 일주일도 안 돼, 북한군은 한강을 건너 빠르게 남하하기 시작했다. 당시 이러한 적의 상황을 정확히 알아내기 위해서는 항공정찰 이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6·25전쟁이 발발했을 때, 대한민국 공군이 보유하고 있던 항공기는 L-5 연락기 12대와 T-6 훈련기 10대가 전부였다.

전쟁 초기 북한군이 한강철교 도하를 시도하자 공군의 이경복 상사와 백성흠 상사 역시 정찰기에 급조된 폭탄을 싣고 수원기지를 이륙해 흑석동 상공으로 방향을 잡았다. 한강 인도교를 발 아래로 보면서 한강철교 쪽으로 기수를 돌려 북쪽 어귀를 정찰하려는 순간 북한군의 대공사격에 피격됐다. 이와 동시에 그들은 적의 탱크 수십 대를 발견했다.

기체 일부가 적탄에 피격돼 점점 심각한 상황에 이르렀으나 이경복 상사와 백성흠 상사는 수원기지에 적진의 상황을 무전으로 알렸다. 이 정찰보고로 미 공군 전투기의 공격을 유도해 북한군의 한강도하를 지연시킬 수 있었다.

무전보고 후 기지에서 복귀명령이 떨어졌으나 기체 손실로 복귀가 불가능함을 알고 있었던 그들은 적진을 향해 기수를 돌렸다. 적진을 뒤흔드는 커다란 폭음과 함께 이경복 상사와 백성흠 상사도 산화했다. 그들의 희생으로 아군은 적의 한강도하를 지연시키고 우리 군의 후퇴와 미 지상군 참전에 필요한 시간적 여유를 확보해 수많은 인명피해를 줄였다.

저작권자 © 나라사랑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