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라도 디 얍(Conrado D.Yap) 대위는 필리핀 제10대대전투단 특수중대 중대장으로 1951년 4월 경기도 연천 북방의 율동전투에 참가했다.율동전투는 중공군의 제5차 공세에 맞서 1951년 4월 22일부터 23일까지 연천 북방의 율동에서 중공군의 공격을 저지한 방어전투다.이 전투에 참여한 필리핀 제10대대전투단은 수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강인한 정신력으로 중공군의 공격을 저지해 인접 부대들이 철수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하고, 중공군 500여 명을 사살하거나 부상을 입히는 전과를 거뒀다.콘라도 디 얍 대위는 퇴로 차단의 위기에
케네스 뮤어 영국 육군 소령은 1950년 아길 엔 서들랜드 하이랜더스(Argyll and Sutherland highlanders, 이하 아길대대) 부대대장으로 부산항에 상륙해 6·25전쟁에 참전했다. 소령은 대구시 달성구 일대의 낙동강방어선에 배치돼 임무를 수행했다.케네스 뮤어 소령이 속한 아길대대는 9월 23일 성주 동남쪽 신부리 일대의 282고지와 389고지를 공격하게 됐다. 북한군의 강력한 저항으로 아길대대 B·C중대가 위기에 처하자 소령은 2개 중대의 통합지휘를 자청해 전투부대를 재편성하고 직접 지휘했다.고립무원의 상황에서
김한준 대위는 6·25전쟁이 발발하자 제7사단 제8연대 소속으로 평양 탈환작전에 참여해 풍부한 전투경험과 지휘 능력을 인정받아 육군 소위로 현지 임관했다.6·25전쟁의 전 기간을 전장에서 보낸 김한준 대위는 “전투는 상하 간의 신뢰로 이뤄진다. 지휘관이 부하를 믿고 신뢰해야 자신을 사지로 몰아가는 명령이라 해도 부하는 따르게 된다”는 전투철학을 신조로 삼았다.그는 지휘관으로서 서로에 대한 신뢰를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했다.휴전협상이 막바지에 달했던 1953년 7월 13일, 중공군은 전략적 요충지인 강원도 금성천 부근을 장악하기 위해
에드워드 포니 대령은 6·25전쟁 당시 인천상륙작전의 주 설계자였으며 미 해병대에서 가장 지식이 풍부한 수륙양면작전의 전문가였다.포니 대령은 포항상륙작전 당시 제1기병사단의 하역과 상륙에 관한 계획을 준비했으며, 1만 명이 넘는 병력과 2,000대 이상의 차량이 포항에 상륙했는데 이는 부산지역 방어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또한 전투 역사상 최대 규모의 민간인 해상 탈출 작전인 흥남철수작전에서 장비, 보급품, 병력의 철수를 조직적으로 이끈 제10군단 지휘단의 책임관으로 활약하며 흥남에 발이 묶여 있던 약 10만 명의 피난민을 무사히
박기석 이등중사와 최재효 하사는 국군 제9사단 29연대 3대대 9중대원으로 1951년 11월 4일 중공군에게 뺏긴 주저항선 상의 281고지를 탈환하는 작전에 참가했다.박 이등중사와 최 하사가 소속된 제9중대가 정상 20m쯤에 다다랐을 때 중공군은 모든 자동화기를 동원해 아군의 돌진을 필사적으로 저지했다. 이때 박 이등중사가 중대장에게 적의 자동화기 진지를 격파하기 위한 특공대를 조직하겠다는 허가를 받고 최 하사 등 4인을 선발했다. 박 이등중사와 최 하사가 먼저 절벽에 올라 2개의 적 기관총 진지를 각각 수류탄으로 파괴하고, 뒤이어
딘 헤스 대령은 한국 공군과 함께 최전방에서 전투를 수행하고, 한국 공군이 독자적인 작전능력을 갖춘 뒤에는 훈련과 감독 임무를 수행한 미 공군 제6414부대의 지휘관으로 전신인 바우트 원(Bout-One)부대 시절부터 이 부대를 지휘했다.딘 헤스는 전투기가 부족하다는 상부의 압박이 들어올 때마다 교육 중인 한국 조종사들과 함께 전투기를 타고 출격해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왔다. 그는 훈련부대에 속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1951년 6월 한국을 떠날 때까지 무려 250회나 출격하며 각종 전투임무를 수행했다. 1950년 10월 중령으로 진급한
박정모 대령은 1946년 해군 1기로 입대해 6·25전쟁이 발발하자 해병대 소대장으로서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했다.이어 박 대령은 1950년 9월 27일 새벽 해병 제2대대 제6중대 1소대장으로서 서울탈환작전에 참여, 소대원들과 함께 치열한 교전을 벌였다.박 대령은 중앙청 내의 적을 제압하고 중앙청 옥상에 걸려 있던 인공기를 내리고 서울 수복의 상징인 태극기를 게양했다.박 대령과 동료가 올린 태극기 게양은 6·25전쟁사의 극적인 한 장면으로 남았으며, 국내외에 보도된 이 사진은 승전을 위한 국군과 유엔군의 의지를 보여주는 단면으로 평가
허봉익 대위는 안동지구전투에서 중대장으로 참전해 2개 소대를 이끌고 북한군 2개 대대와 백병전을 전개해 1개 중대의 북한군을 격멸하는 전과를 거뒀다.7월 31일 새벽 북한군 제12사단은 전차를 선두로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했으며, 이 무렵 육군본부는 낙동강방어선 형성계획에 따라 7월 31일 24시를 기해 안동에서 철수하기로 결정하고 명령을 하달했다.이에 따라 제8사단은 낙동강전선으로 철수작전 진행 중 제16연대는 북한군과 치열한 접전을 벌이다 철수명령을 뒤늦게 전달받았다. 연대는 북한군에게 포위돼 각개로 철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
1950년 7월 적의 대대적 공세에 강원도 경찰은 대부분 남하했지만 강원도비상경비사령부는 화력발전소가 있는 영월을 방어하기로 결정하고 영월지역에 남았다.영월지역에서는 7월 2일부터 수차례의 공방전이 계속됐으며, 영월지구 전투부대의 투혼으로 일시 영월 점유에 성공했으나, 적의 반격으로 영월을 포기하고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영월 탈환의 집념을 버리지 않고 7일 아침 김해수 경감을 대장으로 47인의 결사대를 편성해 영월 재공격을 준비했다.김해수 경감은 남하하는 북한군을 지연시키고 영월지역이 중요한 위치임을 고려한 사령관의 명령을
임부택 소장은 1946년 육군사관학교(국방경비사관학교) 제1기생으로 소위로 임관해 1950년 1월 제6사단 제7연대장으로 부임한 후 북괴군의 남침 징후를 사전에 인지하고, 춘천 주민과 학도호국단의 지원을 받는 등 민·관·군 협력 하에 소양강변 등에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사전 전투준비 태세를 갖췄다.임 소장의 준비로 인해 개전 이후 국군은 북한강과 소양강 북방을 고수하며 막강한 화력의 북한군을 막아내는 성과를 올렸다. 6·25전쟁 초기 3일간 춘천지역에 대한 7연대의 성공적인 방어는 수도권에 투입된 국군 주력부대가 전열을 재정비하고 한
김현숙 대령은 평양 출신으로 일본 동경체육전문학교를 졸업하고 평양 강동여자중학교에서 체육교사로 근무했다. 이후 1949년 예비역 육군 소위로 임관했으며, 국방장관실에 보직돼 지리산 공비토벌작전 때 생포한 여자공비의 전향을 위해 계몽활동을 전개하던 중 6·25전쟁을 맞았다.수많은 어린 남학생들이 군에 입대하는 모습을 보고 여자라고 해서 가만히 있을 수 없다고 판단한 김 대령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여자의용군 모집을 건의했고, 1950년 8월 여자의용군 모집에 관한 담화를 직접 발표했다. 1950년 9월 육군 제2훈련소 예속으로 여자의용군
타흐신 야즈즈 준장은 터키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제1차 세계대전, 터키 독립전쟁, 6·25전쟁에 참전했다. 6·25전쟁 당시에는 준장으로서 터키여단을 지휘했다.1950년 10월 17일 부산항에 도착한 터키여단은 군우리 전투와 평양철수작전, 장승천 전투, 사기막 전투, 네바다 전초전 등 한반도 도처에서 수차례 공방전을 거듭하며 격전을 치렀다. 특히 야즈즈 준장이 지휘한 터키여단은 유엔군의 대규모 위력 수색작전인 썬더볼트 작전에서 김량장리와 151고지전투, 수리산전투를 승리함으로써 유엔군의 전체 작전에 크게 기여했다.용인의 김량장리와
6·25전쟁 당시 현시학 소령은 PC-703함(삼각산)부장 직책 수행 중 서해안 봉쇄작전에서 1950년 7월 27일 옹진방면으로부터 남하 중인 적 수송선단 12척을 PC-702함(금강산)과 협동해 격퇴했다.그는 1950년 8월에는 인천상륙작전 이전에 실시된 도서탈환 작전의 성공에 기여했으며, 고성에서 통영으로 진출하려는 적을 맞아 정교한 함포사격을 가해 적 공격을 차단함과 동시에 통영을 수복하기 위한 아군 해병대의 통영상륙작전 전승에 크게 기여했다.PC-704함(지리산) 함장 임무 중에는 1951년 1월, 황해도 월사리에서 피난민
마리누스 덴 오우덴 중령은 네덜란드 왕립 육군사관학교 졸업 후 소위로 임관해 수많은 전투를 치른 후 1950년 6월 한국전에 참전하기 위해 조직된 유엔군의 네덜란드 대대에 자원했다. 네덜란드는 6·25전쟁을 위해 우리나라에 1척의 구축함과 5,322명의 군대를 파견했다.1950년 10월 21일 오우덴 중령은 당시 소령으로 네덜란드 대대의 지휘관으로 임명돼 1950년 11월 23일 부산항에 도착했다.오우덴 중령과 그의 대대는 전선의 급박한 상황으로 인해 부산에 도착한지 일주일만에 전선으로 파견됐으며, 12월 중순의 혹한 속에서 미 제
6·25전쟁 발발 다음날 우리 공군의 이근석 대령 등 10명은 미군으로부터 F-51 무스탕 전투기 인수를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당시 미국이 제의한 F-51 전투기 인수 조종사 선발조건은 ‘훈련 없이도 전투기를 탈 수 있는 조종사’였는데, 인수에 참여한 10명 중 자격을 갖춘 조종사로 김신 중령이 유일했다. 미 공군에서 F-51로 훈련받은 경험이 있었던 김 중령은 통역과 함께 비행기에 대한 기초적 설명을 맡아 비행훈련 진행과 전투기 인수에 크게 기여했다. 단 한 번의 비행훈련 끝에 전투기를 인수해 7월 2일 귀국한 김 중령 등은
감봉룡 경감은 6·25전쟁 발발 당시 황해도 개성지역 철도경찰대장으로 근무 중이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군의 공세가 시작됐고, 적 정예 제1사단, 제6사단과 13대의 T-34전차의 집중 공세를 막아내지 못한 국군 제12연대는 김포반도로 철수해야 했다.당시 개성경찰서 병력도 대대와 함께 철수했는데, 이때 감 경감이 지휘하는 철도경찰대 전 대원 50명은 본부를 사수하기로 결의하고 본부 주변의 요충지를 점거해 방어태세를 갖췄다.개전 후 처음으로 조직적 저항을 받은 북한군은 철도경찰대의 완강한 저항에 다른 통로로 진출하
벨기에 상원의원이자 국방장관으로 재직 중이던 앙리 모로 드 믈랑은 1950년 6·25전쟁 지원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열린 국무회의에서 장비만 지원하자는 다수의 제안을 일축하고 파병을 주도했다. 벨기에는 그해 7월 1개 보병대대 파병을 관철했다.그는 국방부 장관직을 사임하고 1951년 직접 총을 들고 6·25전쟁에 참전하기까지 했는데 소령으로 복귀해 참전한 당시 그의 나이 50세 였다. 벨기에는 그의 6·25전쟁 참전을 위해 상원의원의 해외 참전을 금지한 당시 법률을 개정했다. 당시 벨기에군은 미 제3사단 예하 영국 제29보병여단에 배
1952년 10월 국군 제9사단과 중공군 제38군 예하 3개 사단은 철원평야 서북단의 백마고지에서 치열한 고지 공방전을 전개했다. 백마고지 전투는 10일 동안 고지의 주인이 24번이나 바뀌고 하루 평균 5만발 가량의 포탄이 작렬한, 세계 전쟁사에서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일진일퇴의 혈전이었다.1952년 10월 11일 국군 제9사단 제29연대 제2대대장인 김경진 소령은 사단장으로부터 불과 1시간 전 제1대대가 물러났던 정상을 탈환하라는 명령을 받고 역습을 감행했다. 그는 고지 정상의 중공군이 진지보강 작업을 시작하기도 전에 빗발치는
김용식 일등병은 1950년 8월부터 9월까지 이어진 기계-안강전투에서 습격 임무를 수행할 특공대에 자원했다. 기계-안강전투는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 방어선을 형성하고 있던 기계와 안강 등지에서 북한군 제12사단의 남진을 저지한 전투다.이 전투과정에서 군사적 요충지인 비학산을 탈환하려는 아군의 작전에 북한군이 완강히 저항하자 김 일등병이 소속돼 있던 부대에 습격임무가 주어졌다. 당시 그는 수도사단 제17연대에 배치된 지 며칠 안 된 신병이었지만 돌격작전에 뛰어들었다. 김 일등병은 전투경험이 거의 없었으나 작전에서 큰 활약을 펼쳤다.
구르무 담보바는 6·25전쟁 중 강뉴부대원으로 두 차례 참전했다. 그는 아프리카 유일한 파병국인 에티오피아의 1진 강뉴전사 1,185명 중 없어서는 안 될 인재였다. 1951년 하일레 셀라시 황제의 명을 받아 참전하게 된 구르무 담보바는 생사를 넘나드는 전장에서 생전 처음 경험하는 눈보라와 혹한에 맞서 싸웠다. 텐트와 동굴생활을 하면서도 적과 격전을 펼쳐 강원도 화천, 철원 일대 700고지, 낙타고지, 요크고지 전투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그는 불행하게도 전투 중 허벅지와 엉덩이 관통상을 입어 고국으로 돌아갔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