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성찰, 그리고 평화. 6·25전쟁 70주년을 지나며 대한민국은 전쟁을 잊지 않고 기억하면서 오늘을 성찰하는 소중한 계기로 삼았다. 그리고 새로운 한반도 평화시대로 나아가기 위한 깊이 있는 토론과 함께 국민과 함께하는 여러 기념사업을 펼쳤다. 은 국방홍보원 와 함께 좌담회를 열어 올 한 해 동안 진행된 70주년 기념사업의 의미와 남은 일, 그리고 새로운 미래보훈을 위한 과제를 함께 짚어본다.◇ 박삼득 국가보훈처장◇ 정호섭 6·25 70주년 기념사업위원회 위원◇ 박명림 연세대학교 교수◇ 캠벨 에이시
독립운동가 서훈과 독립유공자 지정은 관련법에 따르는 것이지만, 법의 제정이나 적용은 독립운동에 대한 일반의 인식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또한 독립운동이 한국사회에 준 공헌이나 독립운동가에 대한 평가는 시대에 따라 정치·사회적 상황에 영향을 받아온 것이 사실이다. 지난달 17일 독립기념과 독립운동사연구소는 ‘독립운동가 서훈의 역사와 과제’라는 학술포럼을 열고 독립운동가 서훈이 시기별로 어떻게 이뤄졌는지 검토하고 향후 발전과정을 검토했다. 이날 한국교원대 김한종 교수의 발표 ‘해방 이후 독립운동가에 대한 사회의 인식’을 요약 정리한다
청산리 전투와 1920년대 항일무장투쟁을 재조명하는 ‘청산리 대첩 100주년 기념 학술세미나’가 지난달 12일 서울 강남구 마리아칼라스홀에서 열렸다. 백야김좌진장군기념사업회(이사장 전지명) 주관으로 열린 이날 세미나는 단국대 한시준 교수 사회로 김주용 원광대 교수(해방 전 만주지역 한인사회 형성과 변화), 김종해 한중우의공원 관장(북로아군실전기를 통해 본 청산리 대첩의 군사 전술적 고찰), 장윤정 단국대 교수(노래로 본 독립운동가 백야 김좌진) 등이 논문을 발표했다. 이번 세미나는 무관객 비대면으로 진행됐으며 온라인 유튜브로 송출됐
전쟁은 피비린내 나는 극단의 현장이다. 전쟁에 참여한 군인은 목숨을 걸고 스스로의 생존을 위해 타인의 생명에 총을 겨눈다. 전장 주변의 사람들은 영문도 모른 채 이편에 서다 저편에 서다 희생당하고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게 된다. 그 상처는 다시 공동체의 상처가 되어 오랜 세월을 견디며 치유의 과정을 가게 된다. 6·25전쟁을 두고 ‘기억’ ‘성찰’ ‘평화를 위한 반성’으로 조명했다. 지난달 15, 16일 있었던 6·25전쟁 7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의 국제학술회의의 소리를 듣는다.‘끝나지 않은 세계전쟁’ - 성찰과 반성올해로 한국
6·25전쟁 연구는 이제 그간 많이 다뤄져왔던 민중, 마을주민 등 아래로부터의 시선 뿐 아니라 보다 다양한 주체의 시선을 따라갈 필요가 있다. 즉 권력, 재산, 거주지, 이념, 성, 나이에 있어 다양한 주체가 6·25전쟁을 어떻게 보았는지, 무엇을 보았는지, 생활과 밀착된 문제를 접하는 구체적 느낌에 주목해 어떠한 감각과 감정들이 ‘전쟁’이라는 인상을 구성했는지 보고자 했다.이러한 감각과 감정은 한국인의 뇌리와 몸에 깊숙이 자리 잡아 그의 생활 전반을 지배하는 무의식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전쟁은 힘없는 사람들에게 있어 무엇보다 중요
한국광복군은 1940년 9월 17일 중국 충칭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군으로 창군했다. 1919년 3·1독립운동의 힘으로 중국 상하이에 세워진 임시정부 수립 이후 20년만의 일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광복군 창군을 통해 군사력(무력)을 갖춤으로써 국권과 국토 회복을 위한 실질적인 투쟁과 작전역량을 갖추게 됐다. 올해로 창군 80년을 맞으며 대한민국 국군의 뿌리가 된 한국광복군 창군과 그 활동, 의미를 짚어본다.조국독립의 불꽃, 한국광복군 창군의 의미1919년 4월 11일, 한 달여 전부터 시작돼 전국으로 확산 중인 3·1독립운동의
항일독립운동과 의열투쟁의 중심은 언제나 남성을 중심으로 서술됐으며, 남성의 역사로 기억됐다. 우리가 알고 있는 독립운동가와 독립투쟁의 주체는 모두 남성이었다. 여성은 단지 그의 아내로 부차적 역할을 한 것으로 폄하되기 일쑤였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이제 여성독립운동에 대한 새로운 조명이 본격화되고 있다. 여성은 국내외 독립운동의 핵심 동반자로 활동한 것을 넘어 근대교육을 받으며 독립운동의 핵심 역할을 해낸 경우에서부터 다소 천시 받았던 기생 등 기층민중 출신의 독립운동까지, 그 폭은 넓고 깊었다. 다시 ‘세상의 절반’인 여성독립
일제 강점기 나라를 찾기 위한 독립운동의 현장에는 많은 여성이 있었다. 그들은 시대와 함께하는 역사의 주역으로서 여성이 있음을 보여주었다. 여성도 남성과 마찬가지로 나라를 잃은 슬픔에 비분강개했고, 그 현실을 이겨내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하려는 의지가 있었다. 일제 식민지에서 민족차별을 없애기 위한 민족해방이 곧 여성해방을 위한 지름길이라고 생각한 여성들도 많았다.항일독립운동은 단순히 저항하는 운동이 아니라 모든 사회구성원이 근대국가의 주인이 되는 역사적 역동의 운동이었다. 그래서 3·1운동 이후 수립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질병에는 국경이 없다는 말은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이하 코로나19)의 전 세계적인 대유행(Pandemic)으로 또 다시 입증되었다. 신종감염병(emerging infectious diseases)의 주기적인 출현은 인류가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는 문제이다. 감염병을 일으키는 다양한 요인들이 서로 복합적으로 상호작용하며, 기후변화 등 인간의 힘으로 극복하기 어려운 자연적인 현상도 얽혀 있기 때문이다.2015년 5월 21일 우리나라에서 메르스(MERS 중동호흡기증후군) 확진자가 처음 발생한 것도 불과 5년 전의 일이다. 같은 해 1
일제 강점기 강제징용에서 6.25전쟁까지 이르는 시대적 배경을 때로는 담대하게 때로는 처절하게 써내려간 하근찬의 단편소설 「수난이대」에는 아버지와 아들 2대에 걸쳐 온 몸과 마음에 새겨진 상처 자욱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수난이대의 등장인물인 아버지 박만도는 삼대독자인 아들 박진수가 생사를 알 수 없던 전쟁터에서 돌아온다는 소식에 어깻바람이 절로 나서 아들을 배웅하러 역전으로 향한다. 강제징용 피해자인 그는 멀쩡한 섬에 비행장을 닦는 공사 중에 비행기의 폭격으로 왼쪽 팔을 잃었다. 박만도는 애써 태연한 체하며, 조끼 주머니에 아무렇
7월 27일, 6·25전쟁 유엔군 참전의 날을 앞두고 부산 남구에 위치한 유엔기념공원으로 향한다. 그늘을 드리우는 비구름이 오가며 이곳의 풍경과 분위기가 더욱 선명하게 다가온다. 유엔기념‘공원’이라는 명칭이 붙어있지만 이곳은 사실 ‘묘지’에 더 가깝다. 우리나라의 평화를 위해 헌신하고 희생한 수많은 유엔군전몰장병들이 안식을 취하고 있는 곳으로, 모든 조경과 시설이 묘지를 중심으로 서 있다. 따라서 이곳은 성역처럼 다소 위엄을 갖추고 자리잡은 듯 느껴진다.거대한 네 개의 기둥과 한국 고유의 아름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의 불법남침으로 한반도의 평화가 일순간 무너졌다. 국가적 운명이 백척간두에 섰던 이 상황은 유엔이 미국의 주도적 역할 아래 적극적인 개입을 결정하면서 방향을 달리하기 시작했다. 유엔군을 파견하는 결단은 유엔 창설 이래 첫 조치였다. 미국을 주축으로 전투부대를 파견한 16개국과 의료지원부대 등을 파견한 나라들은 대한민국 수호에 주도적 역할을 했고, 전쟁으로 피해 입은 많은 사람들의 구호와 전후 복구에 최선을 다했다. 한반도의 자유와 평화를 지킨 유엔군 참전과 역할을 정리한다.유엔군의 참전 과정과 배경
6·25전쟁은 유엔이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적인 국가로 인정한 대한민국을 북한이 1950년 6월 25일 새벽, 공격한 불법적인 남침전쟁이자 ‘국제전쟁’(international war)이었다. 또한 6·25전쟁은 미국을 비롯한 자유 우방국가가 유엔헌장과 유엔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에 따라 국제평화를 유지하고 대한민국을 수호하기 위해 참전한 ‘자유수호’ 전쟁이었다.3년 1개월의 6·25전쟁 기간 동안, 유엔회원국 중 16개국이 전투부대를 파병했고, 6개국이 의료지원 및 시설을 보내왔다. 그 결과 6·25전쟁에 참전한 인원은 196만여 명이
지난 7월 17일은 제 72주년 제헌절이었다. 제헌절은 3·1절, 광복절, 개천절, 한글날과 함께 5대 국경일이다. 제헌절을 글자 그대로 보면 헌법을 제정한 날이다. 하지만, 현재의 헌법 서문에도 나와 있듯이 우리나라 헌법은 7월 12일에 제정되었다. 7월 17일은 초대 국회의장이던 이승만 의장이 헌법안에 서명하고 공포함으로써 헌법의 효력을 발생시킨 날이다. 따라서 엄격한 의미에서 현재의 7월 17일은 헌법을 공포한 공헌절(公憲節)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헌법은 우리나라 법체계에서 최상위 법 규범으로 국민의 권리와 의무 등 기본권에
분과학문으로서의 보훈학은 국가유공자에 대한 연구와 교육을 넘어서 국가보훈에 대해 대중과 지속적으로 대화와 소통을 시도하는 학문을 의미한다. 보훈학은 보훈연구가 현대 한국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공동체 위기와 공공성 확보를 실체화 및 외부화하기 위해 보훈실무자와 연구자를 넘어서 대중과 더불어 국가보훈을 성찰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학문을 지향한다.국가보훈의 분과학문 모색은 지금까지 ‘누구를 위한 보훈인가’와 ‘무엇을 위한 보훈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면서 보훈공동체에만 안주하는 연구 및 교육활동에 문제를 제기하고 상대화하는데서
3·1 만세운동으로 모아진 독립을 향한 꿈이 구체적인 독립전쟁으로 이어진다. 3·1운동 다음해 봉오동과 청산리에서 이뤄진 항일 독립전쟁은 평범한 사람들의 용기이자, 조국 독립을 향한 간절한 의지였다. 그로부터 100년, 오늘 다시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를 생각하는 것은 대한민국을 질시하고 흔들려는 주변국 속에서 당당하게 일어서고 있는 우리의 자존심이자 민족적 역량에 대한 재확인이다. 100년 전의 전투현장 그 속에서 우리는 독립과 용기와 희망을 함께 발견한다. 봉오동전투 - 국내 진공을 위한 첫
사람은 누구나 특정한 날을 기념하여 그날의 의미를 되새기며 구성원 사이의 연대감과 소속감을 확보하려 한다. 우리는 이를 정체성이라 말한다.그런데 정체성은 고정 불변이 아니다. 모든 기억은 유기체이며 현재의 시재를 반영하면서도 현재에 존재하지 않고 과거의 존재를 불러 미래를 말하려고 한다. 사람의 기억이 개별적인 사실들의 퇴적 과정에서 보존된 결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현재와의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바뀌어 가기 때문이다.기억의 역동성은 개인과 국가를 구별하지 않는다. 특히 국민국가 만들기에서 기억은 학교와 사회 교육에 의해
6.25를 맞는 달 6월은 늘 사라지지 않는 초연의 자취를 느끼게 한다. 하지만 올해는 한국전쟁 70주년을 맞아 남북 분단 상황의 종식과 한반도 평화에 대한 열망이 더욱 절실해 지고 있다. 이러한 시기에 목함지뢰로 인해 두 다리를 잃은 하재헌 중사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 민족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 전쟁에서 평화로 나아가야 함을 시사한다.2015년 목함지뢰로 인해 두 다리를 잃은 하재헌 중사가 지난해 새삼스럽게 화재가 된 것은 국방부는 군인사법에 따라 ‘전상’판정을, 보훈처는 이를 뒤집고 ‘공상’판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왜 이러한 판정
국가나 집단 간에 전쟁과 같은 무력 충돌은 없을수록 좋지만, 혹시나 모를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군대는 불가피하게 존재하게 된다. 군대의 근간은 당연히 군인이다. 군인 가운데 일반 의무복무사병이 나무의 가지와 잎과 같다면, 이들을 통제하는 관리자급 군인은 줄기와 같다. 가지와 잎은 뿌리와 줄기를 통해 양분을 공급받는다. 줄기 없는 가지는 존재할 수 없다. 물론 그 역도 마찬가지이기는 하다. 호국보훈의 달 6월을 맞이하여 중장기 복무하고 제대하는 이른바 ‘제대군인’에 대한 국가의 지원정책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제대군인 지원에 관
녹음이 짙어가는 6월. 우리는 6월을 호국보훈의 달로 기억한다. 그리고 올해는 6·25전쟁 70주년이 되는 해. 대한민국을 되찾고, 지키고, 바로 세운 모든 이들을 생각하는 시간이다. 다시 맞는 호국보훈의 달과 6·25전쟁 70주년은 ‘기억’ ‘함께’ ‘평화’라는 단어로 다가온다. 은 나라를 지켜 오늘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6·25전쟁의 한 장면 ‘낙동강방어선전투’를 기억하면서, 함께 호국을 생각하고 다시 평화를 바라보고자 한다.전쟁은 과거이다. 그리고 전쟁이라는 과거를 딛고 오늘이 있다. 우리에게 6·25전쟁은 민족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