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1월 11일 부산 유엔기념공원에서 열린 턴투워드부산 유엔참전용사 국제추모식에서 22개 유엔참전국의 국기가 입장하고 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의 불법남침으로 한반도의 평화가 일순간 무너졌다. 국가적 운명이 백척간두에 섰던 이 상황은 유엔이 미국의 주도적 역할 아래 적극적인 개입을 결정하면서 방향을 달리하기 시작했다. 유엔군을 파견하는 결단은 유엔 창설 이래 첫 조치였다. 미국을 주축으로 전투부대를 파견한 16개국과 의료지원부대 등을 파견한 나라들은 대한민국 수호에 주도적 역할을 했고, 전쟁으로 피해 입은 많은 사람들의 구호와 전후 복구에 최선을 다했다. 한반도의 자유와 평화를 지킨 유엔군 참전과 역할을 정리한다.

유엔군의 참전 과정과 배경

북한의 남침계획은 1948년 9월 김일성 정권 수립과 때를 같이해 김일성, 스탈린, 마오쩌뚱 3자의 긴밀한 협의 아래 추진됐다.

전쟁 준비가 완료되자 북한은 1950년 5월 말 소련군 지원을 받아 극비리에 3단계 선제타격 작전계획을 수립했다. 이 계획은 1단계로 국군방어선을 돌파하고 서울 점령 및 국군 주력부대를 섬멸한 후, 2단계로 일제히 남진해 국군예비대를 격멸하고, 3단계로 미군 참전 이전에 속전속결로 부산까지 점령한다는 것이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은 38선 전역에서 야포와 박격포의 공격준비 사격과 더불어 일제히 T-34 전차를 앞세우고 기습남침을 개시했다. 남침 직후 주한 미국대사 무초는 이 사실을 국무부로 보고했고, 이승만 대통령도 주미대사 장면에게 미국정부의 협조를 요청토록 지시했다.

유엔한국위원단도 저녁 9시 중앙방송을 통해 “북한은 즉각 군사행동을 중지하고 38도선으로 철수한 다음 평화회의를 통해 사태를 해결하라”고 요구했다.

미국도 주한 미 대사관과 극동사령관의 상황보고를 통해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이 문제를 유엔에 제기한다는 방침을 정하고 리 사무총장에게 안전보장이사회의 소집을 요청했다. 이에 따라 유엔은 남침 하루만인 6월 26일 긴급안전보장회의를 개최했다. 이 회의에서 리 사무총장은 유엔한국위원단의 보고서를 인용해 “유엔은 침략에 직면한 한국의 평화와 안전을 회복하기 위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 자리에서 미국이 제안하고 영국이 약간 수정한 ‘공산 침략행위 정지요청에 관한 결의문’을 표결에 부쳐 찬성 9표, 기권 1표의 압도적 찬성으로 가결했다. 알려진대로 소련 대표는 불참해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았다.

6월 28일 다시 열린 안보리는 8시간의 마라톤회의 끝에 ‘한국군사원조에 관한 결의문’을 채택했다. 6·28결의는 6·26결의와 더불어 국군이 유엔군과 함께 공산침략에 대응하게 됨에 따라 전쟁이 북한군대와 국군·유엔군의 전쟁으로 확대되는 전환점이 됐다.

미국의 군사조치

남침소식을 애치슨 국무장관으로부터 25일 밤 11시 20분경 전화로 보고를 받은 북한군이 38도선을 넘은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은 미국에서 토요일 오후였다. 미주리주 고향에서 주말을 보내고 있던 트루먼 대통령은 워싱턴으로 돌아와 일요일 오후 7시경(현지시간) 첫 긴급국가안보회의(NSC)를 개최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안보회의 참석자들의 의견을 경청한 후 정책목표를 또 다른 대전쟁 예방에 두고 북한의 남침을 세계적 수준의 이념대립으로 파악하면서 독립국가에 대한 공산당의 전복행위이며 나아가 침략과 전쟁임이 명백하다면서 참전을 결심했다.

북한군의 남침 직후 미 극동군사령부는 공군과 해군 지원이면 침략을 저지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 아래 지상군 참전은 고려하지 않았다. 그러나 북한군이 남진을 계속해 3일만에 서울이 함락되자 맥아더 미 극동군사령관은 스트레이트메이어 극동공군사령관 윌로비 정보참모부장 등과 함께 6월 29일 한강전선을 시찰한 후 북한군이 한국군을 압도한다며 미 지상군의 개입을 육군에 요청했다. 이에 따라 트루먼 대통령은 30일 다시 안보회의를 열어 공군과 해군의 지원에 이어 미 지상군의 파병도 결정했다.

1950년 7월 1일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미 제4사단 소속 스미스특임부대는 부산에 상륙해 7월 5일 경기도 오산 북쪽 죽미령에서 북한군 제사단과 최초로 교전했다. 이어 사단 주력부대들도 속속 부산에 상륙함으로써 미국이 한국전쟁에 본격적으로 개입하게 됐다.

유엔군 창설과 전쟁 주도

유엔군 중 가장 큰 규모의 군대를 파견한 미군은 한국군을 비롯해 영국·캐나다·호주·터키·필리핀·태국·네덜란드·콜롬비아군 등을 지휘해 사실상 6·25전쟁을 주도했다. 미국은 또한 참전국의 무기, 군수 등을 지원해 세계대전의 전비와 맞먹는 비용을 부담했다.

그러나 초기 유엔군의 참전은 쉽게 대규모로 이뤄지지 않았다. 유엔은 7월 14일 두 차례의 결의문에 지지한 53개국에 지상군 부대를 포함한 전투부대의 참전을 독려하는 서신을 발송했다.

이후 참전 회원국의 숫자가 현저히 늘어나기 시작해 영연방 국가들이 참전을 선언했고, 터키, 태국, 필리핀, 그리스가 부대파견을 제의했다.

7월 초. 국군이 한강방어선에서 치열한 전투를 치르는 동안 유엔의 결의에 따라 미국의 육·해·공군이 참전했고 이어 영국의 해군, 호주의 해·공군, 뉴질랜드의 해군도 참전했다. 7월 7일에는 미국이 작성하고 영국과 프랑스가 제안한 유엔군사령부 설치 결의안을 채택했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유엔군을 지휘하게 되는 통합군사령부의 발족이 이뤄진 것이다.

한국 정부도 유엔의 7·7결의에 따라 국군의 작전권 이양문제를 검토한 끝에, 7월 13일부터 육군본부도 제8군사령부와 합동회의를 가짐으로써 사실상 통합작전의 첫발을 내딛게 됐다. 맥아더 장군은 이렇게 국군의 지휘권마저 이양 받아 24일 정식으로 유엔군사령부를 설치했다.

전쟁의 수행과 유엔군의 지원

국군은 미군과 직접 연합작전을 통해 전술적 전략적 능력을 배가시키고 유대를 강화했다. 제 1, 2차 세계대전을 경험한 미군 지휘관들은 전선을 주도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군 지휘관에게 훌륭한 귀감이 되기도 했다. 전쟁 전개과정에서 공산군 측과 대적한 수많은 격전 가운데 대표적인 전투는 북한군 남침 이후 지연작전 시기의 낙동강방어선전투와, 수세에 몰렸던 전세를 역전시켜 국군과 유엔군의 반격작전이 가능하도록 했던 인천상륙작전, 중공군 개입 이후 전선교착시기 고지쟁탈전 가운데 펀치볼전투 등을 꼽을 수 있다.

대표적으로 예를 들 수 있는 것이 낙동강전투. 낙동강방어선전투는 이전까지 미군과 한국군의 독립적인 작전수행에서 벗어나 미군의 단일 지휘 아래 반격작전을 펼쳐 전투수행능력을 향상시킨 점이 높이 평가됐다. 유엔군은 미군의 일사분란한 지휘 아래 낙동강까지 밀렸던 상황에서 반격을 이뤄냈고, 인천상륙작전으로 승전을 위한 전기를 잡았다.

다시 북진을 시작한 유엔군은 통일을 목전에 두었으나 중공군의 뜻하지 않은 개입으로 다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38선을 중심으로 지루한 공방이 펼쳐졌으나 휴전까지 밀리지 않고 대한민국을 지켜냈다.

유엔군 참전의 교훈

먼저, 유엔군의 참전은 국군을 기사회생시키고, 공산군을 격퇴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둘째, 유엔군의 의료지원부대의 활동은 한국의 의료기술 향상은 물론 낙후된 의료분야 발전에 소중한 초석이 된다. 셋째, 전쟁으로 생활터전과 사회경제 체제의 기반은 황폐화됐으나 유엔의 지원으로 생활안정과 경제발전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유엔군의 참전은 불법 남침으로 위기에 몰렸던 대한민국과 세계의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지켜내는 소중한 결과를 가져왔다. 미완의 전쟁이자 승리를 유보한 전쟁이었지만 유엔의 참전은 이후 대한민국의 경제 기적과 선진국 도약을 위한 밑거름을 마련한 역사적 의미를 갖고 있다.

자료 국방군사연구소 ‘유엔군지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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