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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에 이은 평범한 사람들의 용기, 역량 통합한 빛나는 독립전쟁
나라사랑신문  |  news@narasarang.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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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07.01  14:1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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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만세운동으로 모아진 독립을 향한 꿈이 구체적인 독립전쟁으로 이어진다. 3·1운동 다음해 봉오동과 청산리에서 이뤄진 항일 독립전쟁은 평범한 사람들의 용기이자, 조국 독립을 향한 간절한 의지였다. 그로부터 100년, 오늘 다시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를 생각하는 것은 대한민국을 질시하고 흔들려는 주변국 속에서 당당하게 일어서고 있는 우리의 자존심이자 민족적 역량에 대한 재확인이다. 100년 전의 전투현장 그 속에서 우리는 독립과 용기와 희망을 함께 발견한다.

   
중국 지린성 연변조선족자치주 도문시 토성리에 위치한 봉오동전투 기념비. 옛 기념비가 있던 자리에 2013년 6월 새로 세워졌다.

봉오동전투 - 국내 진공을 위한 첫 충돌, 그리고 승전

1920년 6월 7일 독립군과 일본 정규군의 첫 번째 대규모 충돌인 봉오동전투가 발발했다. 당시는 독립군의 국내 진공작전이 본격화하는 시점이었다.

이 전투의 시작은 화룡현 월신강에서 벌어진 삼둔자전투가 시작이다. 6월 4일 새벽 신민단의 박승길이 지휘하는 30여 명의 독립군부대가 두만강을 넘어 함경북도 종성군 강양동으로 진입해 일헌병 순찰소대를 격파하고 두만강을 건너 귀환했다. 일군은 즉각 독립군 부대 추격에 나섰으나 성과가 없자 삼둔자에서 무고한 양민을 학살하기 시작했으나, 소식을 들은 독립군이 일본군 추격대를 기습함으로써 큰 승리를 거뒀다. 이 삼둔자전투는 최초로 두만강을 건너 독립군을 추격한 일본에 큰 충격을 안겨줬다.

   
상해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에 실린 봉오동전투 기사.

당시 언론은 삼둔자전투 이전 5월 27일에도 20여 명의 무장독립군이 두만강을 건너 국내로 진격해 운무편 서편의 일본 헌병대를 타격하면서 국내진공작전의 본격화를 알리고 있던 상황이었다. 언론은 1920년 3월 독립군단이 연길, 화룡, 훈춘, 황청 등지에서 활동하면서, 밀강, 봉오동, 걸만동 등의 마을에서는 군대를 주둔시켜 조선 진격을 준비하고 있다고 전하고 있었다.

   
삼둔자 부근견취도.

삼둔자전투에서 패한 일본군 19사단사령부는 월강추격대를 편성해 독립군을 섬멸키로 함에 따라 봉오동에서 대규모 전투를 치르게 된다. 보병 기병으로 구성된 170여 명의 추격대와 삼둔자전투에서 패한 중대의 병력은 6월 6일 밤 9시부터 두만강과 해란강 합수목에서 4km 가량 떨어진 한탄동을 도강했다.

일본군의 봉오동 진격을 보고받은 홍범도와 최진동은 봉오동에서 일본군을 섬멸키로 하고 마을 주민을 대피시킨 후 각 중대별 매복지점을 정하고 퇴로까지 확보했다. 7일 오전 6시 30분 봉오동에 도착한 일본군은 봉오동 골짜기 입구에서 전위중대를 보냈으나 독립군의 공격을 받았다. 10시 30분경 다시 부대를 진격시켜 봉오동 골짜기로 들어오기 시작했고 오후 1시경 독립군의 포위망에 들어오자 매복했던 독립군은 일제히 사격을 가해 일본군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전투가 진행 중이던 오후 4시 40분경 천둥과 번개, 비와 우박과 폭풍이 거세져 피아식별조차 어려운 상황에 홍범도의 퇴각명령이 떨어지자 이틈에 일본군도 퇴각하기 시작했다. 이후 일본군은 봉오동에 남은 어린이와 부녀자 16명을 살해하고 황급히 본대로 돌아갔다. 일본에게는 참담했던 이 전투는 이후 본격 대결이 이뤄질 청산리대첩의 전초전인 셈이었다.

언론 보도 등을 종합하면 봉오동전투에 참전한 독립군은 약 250~300명이었으며, 일본군은 대패해 150명의 전사자와 수십 명의 부상자를 냈고, 독립군은 160정의 소통과 3정의 기관총을 노획했다.

봉오동전투를 승리로 이끈 홍범도는 부대정비에 착수하는 한편 독립군 수색작전에 나선 일군과의 전투활동을 계속하게 된다.

 

   
중국 지린성 화룡시 청산리 임장입구에 세워진 청산리전투 기념비. 청산리대첩 80주년을 기념해 건립됐다.

청산리전투 - 6일간의 대전 빛나는 독립전쟁의 성과

청산리전투는 일본군 토벌대가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군을 공격하기 위해 청산리 방향으로 진격하다 1920년 10월 21일 청산리 백운평 부근 골짜기에서 기습공격으로 패퇴한 백운평전투에서부터 10월 26일 새벽까지 6일간 10여 차례의 크고 작은 전투에서 독립군 연합부대가 일본 정규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둔 전투 전체를 포괄한다.

일본군은 기병과 포병 포함 5,000여 명의 병력으로 김좌진부대와 홍범도부대를 향해 총공격을 하게 된다.

<백운평전투> 이 전투는 김좌진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의 독립군부대가 10월 21일 일본군 산전 연대를 청산리 골짜기 백운평 부근에서 섬멸한 전투로, 청산리전투의 상징적 의미를 갖는 승리이다. 김좌진부대는 청산리 골짜기로 추격해오는 일본군을 섬멸키로 하고, 지형적으로 계곡이 좁고 절벽이 높은 곳을 선점해 분산 배치했다.

21일 오전 독립군 부대의 매복 사실을 모르고 백운평 지역으로 일본군이 들어서자 600여 정의 소총과 4정의 기관총, 2문의 박격포가 불을 뿜기 시작했다. 20여분의 교전 끝에 200여 명의 일본군은 거의 전멸당한 채 퇴각하고 말았다. 북로군정서군 최초의 완전한 승리이자 청산리전투의 서전이었다.

<완루구전투> 두 번째 이뤄진 전투는 이도구의 완루구에서 10월 21일 늦은 오후부터 22일 새벽까지 이뤄진 전투이다. 북완루구와 남완루구 중간지대에서 벌어진 전투는 산간마을 숙영 중 산속에 매복시켜 놓은 독립군을 모른 채 일본군이 진격하다 포위되어 400여 명의 일군이 섬멸 당했다. 독립군은 240여 자루의 총도 노획했다.

<천수평전투> 22일 새벽 2시 넘어 이도구 감사촌에 도착한 독립군은 일군 1개 기병대가 천수평에 머물고 있다는 정보를 듣고 4시 30분경 현지에서 일본군에 대한 전면공격을 시도했다. 사전에 퇴로를 차단한 북로군정서는 촌락과 토성 안에서 자고 있던 일군에 집중사격을 가해 일군 27연대 소속 기병중대 전원을 몰살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어랑촌전투> 청산리전투 중 가장 큰 승리를 이뤄낸 전투로 22일 오전 7시 30분부터 해 질 때까지 어랑촌 서남방에서 김좌진부대와 홍범도연합부대가 함께 일본군과 대격전을 벌인 전투이다. 북로군정서군 600여 명과 홍범도연합부대 700~800명이 연합해 일본군 1,500여 명의 병력과 접전을 벌인 전투는 일본군 주력이 어랑촌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김좌진부대의 고지 선점에서부터 시작됐다.

일군과 북로군정서군 사이의 교전이 진행되던 중 완루구전투를 끝낸 홍범도부대가 연합하면서 전력이 보강된 독립군은 일본군에 더욱 커다란 타격을 가할 수 있었다.

하루 종일 계속된 전투는 보급이 부족한 상황에서 굶주림을 이겨내며 계속됐으나 위험을 무릅쓴 동포들의 후원이 있어 전투를 승리할 수 있었다. 어랑촌전투 패배로 일군은 1,000여 명이 사살되는 피해를 입었으며, 전투가 치열해 독립군도 100여 명이 희생당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천보산전투, 고동하전투> 천보산전투는 이범석의 북로군정서 1개 중대와 홍범도부대 일부가 24일 저녁 8시와 9시경, 25일 새벽 천보산 서남쪽 광산을 지키던 1개 중대 규모의 병력을 공격해 승리한 전투. 세 차례 공격을 당한 일군은 서둘러 보병 1개 중대와 기관총 1개 소대의 병력 증원을 요청해 보충했으나 패배를 피할 수는 없었다.

고동하전투는 청산리전투의 마지막 전투로 25일 밤부터 26일 새벽 사이 일군이 홍범도부대를 야습했다 오히려 반격을 당한 전투다. 이 전투에서 홍범도연합부대와 국민회군 등 400여 명의 독립군은 일본군 지대장이 직접 거느리는 150명의 일군과 접전해 2개 소대 100여 명을 섬멸했다.

한인사회 지원으로 민족 역량 통합

청산리전투의 큰 성과와 관련해 북로군정서의 서일 총재는 △생명을 돌보지 않고 분용결투(奮勇決鬪)하는 독립에 대한 군인정신이 적을 압도한 것 △진지 선점과 완전한 준비로 사격성능의 극대화 △임기응변 전술과 신속한 활동으로 적의 의표에서 벗어난 것 등을 승리의 원인으로 꼽았다.

청산리전투는 1920년 일제에 의해 나라가 강점당한 우리 민족이 만주지역을 중심으로 건설한 한인사회와 이를 바탕으로 한 민족적 역량을 통합한 빛나는 독립운동사의 한 장이 됐다.

<참고자료 :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3·1운동 직후 무장투쟁과 외교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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